2017년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 담화 발표를 위한 기자 회견문
- 작성일2017/10/2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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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170613d 2017년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 담화 발표를 위한 기자 회견문
발표자는 아래와 같다. 발표자: 리노 피시켈라 대주교 지난해 11월 13일 주일에 전 세계 모든 주교좌 성당에서 자비의 문이 닫힐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희년을 거행하셨습니다. 이때 교황님께서는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 우리가 배척을 언급할 때, 우리는 곧 구체적인 사람을 생각합니다. 사람은 쓸모없는 물건이 아니라 소중한 인격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의 정점에서 만드신 인간은 종종 버려지거나 덧없는 것을 선호하여 무시됩니다. 이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인간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이러한 거부에 익숙해지는 것은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마비되어서 우리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고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거나 우리 세상의 심각한 문제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걱정해야 합니다. …… 오늘 전 세계 주교좌 성당과 성지에서 자비의 문이 닫히고 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청하는 우리 이웃 …… 특히 우리가 잊히고 배척된 형제자매, 우리 문 앞에 있는 ‘라자로’에게 눈을 감아버리지 않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곳이 교회의 확대경이 가리키고 있는 곳입니다. …… 이러한 성찰에서 비추어, 저는 오늘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제정합니다.” 마지막 구절은 그날의 행사를 위해 준비된 강론 본문에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찬 예식에 참여한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자연스레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발표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며칠 전부터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으며, 그들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가장 깊은 소망과 함께 자신의 어려움을 교황님께 표현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그들을 오래도록 안아 주셨습니다. 아마도 교황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눈길과 눈물에서 깊은 인상을 받으셨기에, 바로 그 순간 강론 본문에서 눈을 떼시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선포하셨습니다. 어쨌든 교황님의 바람은 곧바로 실현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교서 「자비와 비참」(Misericordia et Misera)에 서명하실 때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세계의 모든 성당과 순례지에 있는 자비의 성문의 폐막에 즈음하여 ‘사회적으로 배척된 이들을 위한 희년’에 비추어 저는 이 특별 성년의 또 다른 가시적 표징으로 교회 전체가 해마다 연중 제33주일에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거행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거행을 준비하는 가장 의미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작고 가난한 이들과 같은 존재로 여기시며 우리의 자비의 활동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31-46 참조). 이날은 공동체와 모든 세례 받은 이가 복음의 핵심이 가난인 이유를 생각하고, 라자로가 여전히 우리들의 집 문 앞에 누워 있다면(루카 16,19-21 참조) 정의나 사회적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날은 새로운 복음화의 참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마태 11,5 참조). 이를 통하여 교회는 자비의 증인이 되고자 교회의 지속적인 사목적 회개에서 그 모습을 쇄신합니다”(21항). 이러한 지평에서 필요한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 오는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에 모든 교회에서 거행되고 이날을 위한 담화가 오늘 발표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전임 교황님들께서 제정하시고 이미 우리 공동체 생활의 전통이 된 주일들에 더하여 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지냄으로써 비길 데 없는 복음적 충만, 곧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우선적 사랑이 보태지기를 바랍니다”(6항).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 자신의 존엄을 너무도 자주 짓밟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는 요한의 첫째 서간의 성경 표현을 상기시켜 줍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요한 복음사가의 말로 담화를 시작하십니다. 그 권고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표현합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행동, 곧 구체적 봉사와 공허한 말의 차이를 언급합니다. 이에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우리가 이따금 펼치는 봉사 활동이나 양심의 평안을 위하여 즉흥적으로 실행하는 선의의 수혜자로만 단순히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로써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와 그로부터 흔히 비롯되는, 불의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데 유용한 도움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가난한 이들과의 진정한 만남과 나눔의 생활 방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3항). 다음의 두 표현은 오늘 8개 언어(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폴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아랍어)로 발표되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의 심오한 의미를 서술하고 요약하며, 이 두 표현을 축으로 담화가 전개됩니다. 첫 번째 표현은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네”입니다. 교회는 가련한 이의 부르짖음에 무감각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의 맨 처음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미사여구를 버리고 가장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참조)라고 하신 주님의 중요한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 직분은 형제애와 연대를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2항 참조). 교황님께서는 교회의 역사에서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주의 깊게 듣지 못한 시간들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인 시기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삶을 바치는 사람들”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사랑을 드러내는 역사의 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표현은 ‘나눔’과 관련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나병 환자들을 품어 안고 구호하는 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진정한 사랑은 함께 머물러 서로 가까이에서 소외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질병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는 것으로 이해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러한 모범에서 시작하시어, 교황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가난한 사람과의 만남이 나눔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삶의 방식이 되기를 제안하십니다(3항).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당면 과제는, 무관심으로부터 그리고 흔히 부유한 문화가 누리는 특권인 안전함과 편안함으로부터 벗어나, 가난은 우리가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가치로도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이 가난한 예수님을 따르는 소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은, 우리 피조물의 한계와 죄악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전능하고 불멸하는 존재로 느끼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은 돈과 경력과 사치를 우리 인생의 목표이자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데서 벗어나게 해 주는 내적 자세입니다. …… 가난은 우리가 물질의 올바른 사용에 가치를 둘 수 있게 해 주고, 이기적이고 소유하려 하지 않는 관계를 맺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는 척도입니다”(4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 담화에서 특히 오늘날 명확하게 가난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수많은 형태의 가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통, 소외, 억압, 폭력, 고문과 옥살이, 전쟁, 자유와 존엄의 박탈, 무지와 문맹, 응급 의료 상황과 일자리 부족, 인신매매와 노예살이, 망명, 극빈과 강제 이주의 모습으로 도전합니다. 가난은 돈과 권력의 권모술수에 짓밟히고 저열한 이익을 위하여 착취되는 남녀노소의 모습에 존재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는 “선택받은 소수의 탐욕, 대중의 무관심” 때문에 지속적으로 연장되고 있는 “씁쓸하고 끝도 없이 많은 사례”입니다. 이러한 심각한 병리 현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치료는 ‘상호성’의 형태에서 발견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고자 하는 이들을 통해 가난한 이에게 하느님의 온유와 자비가 닿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을 잃고 소외되고 학대와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매일의 삶에 새겨진 복음적 가난의 감각을 다시 발견하도록 촉구합니다. 상호성의 측면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로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린 문과 문지방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은 두 손을 내밀어 뻗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도움을 청하고, 다른 사람은 도움을 줍니다. 실제로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정말로 가난한 사람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니면 둘 다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나눔을 청하며 손을 뻗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밖으로 나아가 나누도록 초대받습니다. 이들의 내민 두 손이 서로 만나 두 사람 모두 무엇인가를 줍니다. 두 팔은 연대를 표현하고 문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이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움과 나눔이 있는 집이라고 여긴다면, 가난한 이는 그 집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담화 내용이 더욱 잘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들을 포용하고 도와주려고 내미는 손길은 행복합니다. 이는 희망을 가져다주는 손길입니다. 모든 문화적 종교적 장벽과 국경을 뛰어넘어 인류의 상처에 향유를 뿌리며 위로하는 손길은 행복합니다. ‘만약’ ‘그러나’, ‘혹시’ 하는 마음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미는 손길은 행복합니다. 이 모든 손길은 형제자매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5항). 교황님께서는 교회 전체와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모두가 도움을 청하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도록 촉구하십니다. 종교나 피부색이나 그들이 속한 국가와 관계없이 등을 돌리지 않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만남의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기심과 두려움으로 쌓아 올린 벽과 경계와 장벽을 허물도록 요청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대와 형제애가 인간의 고유한 가치이고 예외 없이 인류에게 주어진 본래의 선물이라는 것을 되새깁니다. 가난이 경계나 장벽을 모르고 전 세계에 퍼져있는 것처럼, 연대도 모든 이에 대한 참된 형제애의 표현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더욱 구체적인 방식으로, 개별 교회들은 기존의 다양한 자원봉사 분야의 생활을 이어 나가는 데 가장 적절한 모든 형태를 발견하도록 초대받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앞서는 한 주간 동안 모두가 헌신하여 “만남과 우정과 연대와 구체적 도움의 계기를 마련”하도록 요청하십니다(7항). 가난한 이와 자원봉사자가 함께 거룩한 주일 미사에 참여하도록 요청하고, 이후에 가난한 이들을 “우리 식탁에 귀한 손님”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사제와 자원봉사자들이 이러한 시간을 더욱 강력히 이행하도록,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는 9월부터 ‘사목 지원금’을 사용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직접 거행하실 것입니다. 이때 교황님께서는 많은 가난한 이들과 자원봉사자들과 함께하는 미사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집전하실 것입니다.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특별히 성 밖에 있는 성 라우렌시오 성당에서 11월 18일 토요일에 사전 밤 기도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성당은, 가난한 이를 교회의 참되고 유일한 ‘보화’로 칭송하시며 순교로써 사랑의 봉사에 대한 영원한 증인이 되신 로마의 위대한 라우렌시오 성인을 기념합니다. 이 시간은 또한 매일 묵묵히 가난한 이들을 돕는 봉사를 실천하는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많은 다른 이들을 [사랑의] 증거에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오늘 모든 교회에 보내시는 이 ‘담화’의 목적은 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 “우리 신자들의 양심에 강력히 호소하여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나눔으로써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을 키우는” 희망을 전하는 데에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우리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들입니다”(9항). 발표자: 호세 옥타비오 루이스 아레나스 대주교 맨 처음부터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실제로 초기부터 도움과 나눔에 대한 교회의 헌신은 진질성의 빛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도와주는 것에 대하여 칭송하면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따르도록 이끕니다. 진실성의 핵심 기준은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갈라 2,10 참조).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도움의 수많은 표현을 발견합니다. 고독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한 의료, 교육, 보호 분야에서 도움을 주는 많은 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관은 많은 믿는 이들의 너그러움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시어 가난하게 사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말과 몸짓은 가난한 이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고 도와줄 때 그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과 현존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교황님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이들 교황님께서는 교도권 문헌들을 통해 모든 교회가 헌신과 너그러움으로 응답하여 사회를 도와 품위 있는 삶에 필요한 재화가 모든 이에게 돌아가도록 지속적으로 초대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또는 철학적 영역이 아닌 가장 우선이 되는 신학적 선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선택은 교회의 모든 전통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에서 가장 우선하는 특별한 형태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황님께서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가난한 이를 사회적으로 수용하여야 하는 긴급성을 크게 강조하고 이러한 측면에 특별한 관심을 표현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온전히 사회에 융합될 수 있도록 그들의 자유와 발전을 돕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순종과 관심으로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경청하여 도움을 주는 모두의 노력을 전제로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제정하시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이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이날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은 첫째 명령의 요구를 자각하도록 일깨웁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없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사랑의 형태인 복음 선포는 오해를 받거나, 대중 매체에 좌우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날마다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는 말의 홍수에 침몰될 위험이 있다.”(「복음의 기쁨」, 199항)고 상기시키십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설교와 실천에서 일관성을 유지하시며 우리에게 그 누구도 가난한 이와 사회 정의에 관한 문제에서 책임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바티칸 게시판 2017년 6월 13일, 영어 이탈이아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