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금융 문제-현 경제-금융 체계의 일부 측면에 관한 윤리적 식별
- 작성일2018/07/3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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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신앙교리성과 교황청 온전한 인간 발전 촉진을 위한 부서
경제와 금융 문제
(Oeconomicae et Pecuniariae Quaestiones)
현 경제-금융 체계의 일부 측면에 관한 윤리적 식별
I. 들어가는 말
1. 경제와 금융 문제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인류의 물질적 행복에 대한 금융 시장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시장의 역동성에 대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메커니즘 자체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참된 인간관계를 통해 실현되는 행복을 보장하는 분명한 윤리적 토대가 필요하다. 오늘날 이러한 윤리적 토대는 특히 경제-금융 체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비롯하여 많은 분야에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 지식과 인간 지혜의 종합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종합이 없으면 모든 인간 행위는 퇴보해 버리기 마련이지만, 반대로 그러한 종합을 이루면 참되고 온전한 인간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2. 모든 개인과 모든 인간 공동체와 온 인류의 온전한 발전은 “구원의 보편 성사”1) 인 교회가 이룩하고자 하는 공동선의 궁극적인 지평이다. 선의 이러한 완전함은 하느님 안에 그 기원과 궁극적인 완성이 있고, 만물의 머리이신(에페 1,10 참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 완전한 선이야말로 교회가 하는 모든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러한 선이 무성하게 꽃필 때 우리는 교회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선포하고 세우도록 부름 받은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다.2) 또한 이 완전한 선은 사랑의 고유한 열매이다. 교회 활동의 빛나는 길인 사랑은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사랑으로도 표현되어야 한다. 이 사랑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으로 드러난다. 사회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에 대한 투신은 개인들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에도 영향을 주는 애덕의 탁월한 표현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 ‘사랑의 문명’이라는 이상을 제시한 것이다.”3) 진리에 대한 사랑과 따로 떼어낼 수 없는 완전한 선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발전의 열쇠이다.
3. 교회는 모든 문화에는 수많은 윤리적 합의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완전한 선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 이러한 윤리적 합의는 공통된 도덕적 지혜를 표현하고4) 인간 존엄의 바탕이 되는 객관적인 질서를 형성한다. 또한 분명한 공통 원칙들을 형성하는 이 객관적 질서라는 없어서는 안 되는 굳건한 뿌리 위에, 인간의 기본 권리들과 의무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객관적인 질서가 없으면 최고 권력자들의 횡포와 남용이 전 인류를 지배해 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의 지혜에 뿌리내린 이 윤리 질서는 참된 정의가 새겨진 법률로 다스려지는 가치 있는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한 바탕이 된다. 사람들이 아무리 온 마음으로 선과 진리를 열망하더라도 흔히는 기득권이나 압제나 부당한 관행에 굴복해 버리고 이로써 특히 힘없고 무방비한 이들을 비롯하여 전 인류의 극심한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현실 앞에서, 이는 더욱더 분명하다.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자주 도탄에 빠트리는 그러한 도덕적 무질서에서 이를 해방시키려는 목적에서, 교회는 겸허한 확신을 가지고 몇 가지 분명한 윤리 원칙들을 모든 이들에게 일깨워 주어야 할 사명이 자신의 으뜸 과제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한다. 모든 사람의 지울 수 없는 특징인 인간 이성은 이와 관련하여 현명한 식별을 요구한다. 나아가, 진리와 정의 안에서 인간 이성은 그 작용에 뒷받침이 되고 그 방향 감각도 잃지 않게 해 주는 굳건한 바탕을 찾는다.5)
4. 따라서 인간 활동의 그 어떤 영역에도 이성의 올바른 지향이 결여될 수 없다. 곧, 자유와 진리와 정의와 연대에 기초한 윤리 원칙들과 무관하다거나 이러한 윤리 원칙들이 스며들 수 없다고 정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인간 활동 영역은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6) 정치와 경제에 관한 현행 법률들이 적용되는 영역들도 마찬가지다. “공동선을 고려할 때 오늘날 정치와 경제는 반드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삶, 특히 인간의 삶에 봉사해야만 한다.”7)
실제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하느님께서 본래 모든 이를 위해 마련해 주신 선물들을 관대하고 공평하게 사용하고, 또한 모든 피조물 안에 그 풍요로움의 약속으로 뿌려진 선의 씨앗을 생생한 믿음으로 키우면서 열매 맺으라는 당부를 받고 있다. 설령 죄가 이 태초의 하느님 계획을 방해하려고 호시탐탐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열매를 맺으라는 당부는 인간의 자유로 부르는 끊임없는 초대가 된다.
이러한 연유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만나러 오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부활의 놀라운 사건에 동참하게 해 주심으로써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신다.”8) 또한 진리와 사랑에 바탕을 둔 사회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일하신다. 이 새로운 질서가 역사를 바꾸는 풍요로운 누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위격으로 오시어 선포하고 시작하신 그 하늘 나라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리 맛보게 해 주신다.
5. 물론 20세기 후반에 그 전에는 결코 체험해 보지 못했을 정도로 크고 급속하게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이와 동시에 국가 내부적 불평등과 국제적 불평등도 더 심각해졌다는 사실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9) 또한 여전히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계속 극심한 빈곤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최근의 금융 위기는, 윤리 원칙들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새로운 경제를 발전시키고, 약탈과 투기 성향을 누그러뜨리고 실물 경제의 가치를 인정하는 새로운 금융 활동 규제를 수립할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비록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진 바람직한 많은 노력들은 인정받고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낡은 기준들을 재검토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0) 오히려 정반대로 이따금 공동선을 무시하면서 부의 창출과 확산뿐 아니라 오늘날 매우 확연한 불평등의 척결에 대해서도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근시안적이고 폐쇄적인 이기주의의 극치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6. 이 세상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발전과 참다운 행복에서 “배척되고 소외될”11) 위험에 처해 있는 반면에, 일부 소수는 더 많은 이들의 상황에는 무관심한 채 막대한 자원과 부를 혼자서만 이용하고 독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참으로 인간다운 면모를 되살리고, 정신과 마음의 폭을 넓히며, 진리와 선이 요구하는 것을 충실히 깨달아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회 정치 경제 체계는 마침내 실패하고 붕괴해버리고 말 것이다. 언제나 더 분명한 사실은, 결국 이기주의는 자신은 무임승차하면서 모든 이에게 지나치게 비싼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류의 참 행복을 바란다면, “돈은 봉사해야지 지배해서는 안 된다.”12)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형태의 경제와 금융을 발전시키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이를 책임지는 유능한 운용자들의 몫이다. 새로운 형태의 경제 금융의 규칙과 규정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 제시하는 분명한 지침에 따라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고 공동선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문서를 통하여, 도덕에 관한 문제들도 관할하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교황청 온전한 인간 발전 촉진을 위한 부서와 협력하여, 그러한 공동선 증진을 지지하고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기본적인 고려 사항들과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13) 특히, 인간학적이고 도덕적인 올바른 토대 없이 운용되며 명백한 남용과 불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제 체계의 위기를 자아내는 힘을 입증해 왔던 금융 거래의 일부 측면들에 관한 윤리적 성찰이 필요하다. 선의의 모든 이에게 이러한 식별을 하도록 권유하고자 한다.
II. 기본 고려 사항
7. 일부 기본적인 고려 사항들은 오늘날 모든 이론이나 사상 학파를 떠나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의 눈에도 분명한 것이다. 이 문서는 다양한 이론과 사상 학파들이 나누는 정당한 논쟁에 간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대화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언제 어디서나 보편타당한 경제 공식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한다.
8. 인간의 모든 실재와 행동은 올바른 윤리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질 때, 곧 인간 존엄을 존중하고 공동선을 지향할 때 긍정적이다. 이는 인간 사회가 만들어 내는 모든 제도에 해당된다. 따라서 금융을 포함한 모든 단계의 시장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장들이 낳은 체계들도 -더욱더 복잡해지는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어떤 알지 못하는 역동성을 따르기 이전에 이미- 사람들 개개인의 자유를 포함하는 관계들을 바탕으로 수립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른 모든 인간 영역과 마찬가지로 경제도 “올바로 돌아가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그것도 인간 중심적인 윤리가 필요하다.”14)
9. 따라서 올바른 인간관이 없으면 드높은 인간 존엄과 참된 공동선에 맞갖은 윤리나 관행이 세워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실제로, 아무리 모든 기본 관념들에 대해 중립적이라거나 초연하다고 주장한다 해도, 모든 인간 행위는 -경제 영역에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내포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낳는 결과와 발전을 통해 그 가치가 드러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는 사람을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주로 소비자로 여기는 편협한 인간관을 지니고 있음을 스스로 보여 주어 왔다. 소비자의 이익은 무엇보다도 그의 금전적 소득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실제로 고유하게 관계적 본성을 지니고 또한 영리와 행복을 항구히 추구하는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더욱 총체적인 것으로서, 소비 논리나 삶의 경제적 측면으로 축소될 수 없다.15)
인간의 이 근본적인 관계적 본성은16) 본질적으로, 인간의 기본 욕구들에 대한 모든 환원주의적 시각에 저항하는 합리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재화”의 교환을 모두 그저 “사물”의 교환으로 축소시켜 규정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 재화가 전달될 때에는 언제나 물질 재화 이상의 어떤 것이 관여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물질 재화는 흔히 다른 비물질 재화의 전달 수단이 되고, 이러한 비물질 재화의 존재 여부에 따라 분명히 경제 관계의 질(예를 들어, 신뢰, 공정, 협력 등)도 결정되는 것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증여의 논리는 등가 교환 논리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이 등가 교환 논리와 떨어질 수 없고 상호 보완되는 것임을 잘 이해할 수 있다.17)
10. 인간을 그 자체로 긍정적 자원인 관계망 속에 본질적으로 포함되는 주체로 이해하는 인간관이 지니는 장점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18) 모든 사람은 친숙한 환경에서, 다시 말해서 이것 없이는 자신이 존재할 수 없었을 그런 기존 관계들 속에서 태어난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함께 누리는 자유처럼 이 세상에 자신을 실제로 존재하게 해 주는 기존의 유대 덕분에 삶의 단계들을 거치며 성장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본래의 유대를 통해 인간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친교’를 특징으로 하는 관계적 존재임이 드러난다.
이 친교적 본성은, 모든 인간 안에 그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를 당신과 함께 나누는 친교의 관계로 부르시는 바로 그 하느님을 닮은 흔적이 있음을 입증해 주는 한편, 자아 실현을 위한 기본적 자리인 공동체 생활로 그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특성을 우리 인간 정체성이 기원적으로 지니는 본질적 요소로 인정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주로 잠재적인 경쟁자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선을 구축하는 일에 함께할 수 있는 협력자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모든 이와 각 사람들을 동시에 살피지 않는 선은 진정한 선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 인간학은,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삶의 전반적인 질적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경제 전략들의 타당성을 인식하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곧, 무분별한 이윤 증대에 앞서, 인간 전체와 모든 인간의 온전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삶을 목표로 하는 경제 전략들을 말한다. 실제로 어떠한 이윤도 인간의 온전한 발전, 재화의 보편적 목적,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전망이 부족하면 정당하지 않다.19) 더욱 평등하고 연대하는 세상의 건설이라는 전망에서 이 세 원칙은 서로를 내포하고 시사한다.
그러므로 한 경제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발전을 측정할 때에는, 양과 이윤 추구의 기준뿐만 아니라, 그 경제 체계가 이룬 삶의 질과 또 단순히 물질적인 측면에만 국한될 수 없는 행복의 사회적 확산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모든 경제 체계는 교환의 단순한 양적 성장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모든 이와 각 사람의 발전을 증진하는 그 역량을 통해서 번영함으로써 그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행복과 발전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뒷받침하며20) 단기적이지 않고 지속 가능한 정책과 전망을 요구한다.21)
이러한 측면에서, 특히 대학교들과 경영자 과정들은 학업 과정의 보완적 의미만이 아니라 그 기본적인 요소로서, 학생들이 인간의 일부 차원만 축소하여 바라보지 않는 완전한 인간관과 이를 표현하는 윤리에 비추어 경제와 금융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양성 과정을 내다보고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사회 교리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11. 따라서 행복은 한 나라의 국내 총생산(GDP)보다 더 포괄적인 기준으로 측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안전과 건강, ‘인적 자본’의 성장, 사회생활과 노동의 질처럼, 그 밖에 다른 기준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추구하거나 경제 활동의 종합적인 목표로서 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여기에서, 무상성, 다시 말해서 참되고 의로운 것이 그 자체로 자산임을 발견하고 이를 실현하는 무상성을 측정 규범으로 하여 가늠할 수 있는, 인본주의적 기준과 문화적 표현과 사고방식이 지니는 중요성이 드러난다.22) 이득과 연대는 더 이상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실제로, 이기주의와 기득권이 팽배한 곳에서는, 이득을 취하는 것과 주는 것 사이의 풍요로운 순환성을 사람들이 파악하기가 어렵다. 죄가 이러한 순환성을 변질시키고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전히 인간다운 전망에서 볼 때, 이윤과 연대 사이에는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 덕분에 시장의 모든 긍정적인 잠재력을 북돋우는 선순환이 수립되는 것이다.
무상성의 인간다운 자질을 깨달으라는 항구한 요구는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표명하신 황금률에서 흘러나온다.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을 통하여,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도 남에게 해 주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마태 7,12; 루카 6,31 참조).
12. 어떠한 경제 활동도 진취적인 건전한 자유를 펼칠 수 없는 곳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또한 경제 이해 당사자들이 누리는 자유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참된 것과 선한 것에 대한 그 본질적인 기준에서 멀어져 버리면, 패권의 중심부를 형성하려 하고 결국 경제 체계의 효율성 자체를 약화시키는 일종의 금융 소수 지배제 형태로 기울게 만든다는 사실도 오늘날 분명히 입증된다.24)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 금융의 주요 세력들과 방대한 경제 금융망의 지배가 점점 더 증대되고 확산되어 가는 현실 앞에서, 정치권력의 수행을 대리하는 이들이 흔히 초국가적 세력들과 그들이 운용하는 자본의 변동성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무력해지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 권위들은 공동선의 봉사자로서 그들 본연의 소명에 부응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깨닫고 있고, 심지어 공동선과 무관한 이익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25)
이 모든 것 때문에, 경제와 정치 당사자들이 새롭게 협력하여,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사회 전체의 완전한 발전에 이바지하고 연대의 요구를 보조성의 요구와 합치시키는 모든 것을 촉진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시급하다.26)
13. 원칙적으로, 시장이 그 분배 역량을 강화하려고 활용하는 모든 기금과 수단은 인간 존엄을 위배하거나 공동선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27)
그러나 경제의 강력한 추진력인 시장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28) 실제로 시장은 시장의 원활한 운영을 보장하는 요건들(사회 공존, 정직, 신뢰, 안전과 보안, 법률 등)을 조성할 줄도, 인간 사회에 해를 끼치는 시장의 악영향(불평등, 불균형, 환경 훼손, 사회적 불안, 사기 등)을 시정할 줄도 모른다.
14. 더욱이, 그 운용자들 대부분이 매우 선하고 바른 의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금융 산업은 오늘날 실물 경제를 좌우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할 수 있는 불가피한 영향력과 파급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기주의와 권력 남용으로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도 지니고 있는 자리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경제-금융계에는 일부 수단들이 윤리적 관점에서 바로 용납 못할 만한 것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가까운 미래의 부도덕 사례들을 조장하는 여건들이 확인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불리한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종의 남용과 사기가 쉽게 양산되는 경우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일부 금융 수단의 상업화는 그 자체로 합법적이지만, 불균형의 상황에서는 지식 부족이나 계약 상대방의 취약점을 악용할 가능성이 있고, 이는 그 자체로 마땅히 있어야 할 올바른 관계를 위반하는 것이 되고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중대한 위반인 것이다.
현 상황에서, 수많은 금융 상품의 복합적인 특성은 그러한 불균형을 체계 자체의 본질적인 요소로 만들고, 이러한 상품을 상업화하는 이들에 비해 구매자들을 열등한 위치에 자리매김해 버린다. 따라서 전통적인 구매자 위험 부담 원칙(caveat emptor)의 극복을 다방면에서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구매한 재화의 질을 평가할 책임은 그 누구보다도 구매자에게 있다는 이 원칙은 실제로, 계약 당사자들은 고유의 이해관계를 수호할 능력을 동등하게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이러한 동등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특정 종류의 계약의 수립에서 오는 명백한 위계적 관계(예를 들어, 채권자와 채무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금융 수단들의 복잡한 구조화 때문이다.
15. 돈 그 자체는, 인간이 다루는 다른 많은 것처럼, 좋은 수단이며 개인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넓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은 쉽게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업계의 금융 측면, 곧 기업이 자유로운 증권 거래계의 창구를 통하여 자금을 얻는 데 초점을 두는 그러한 측면은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와 같은 현상은, 주로 가상 재산이 투기적 거래와 고빈도 매매에만 집중하여 과도한 자본을 축적하고 실물 경제의 선순환에서 자본을 빼내어 가게 함으로써, 나쁜 금융 관행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29)
안타깝게도 백 년 전의 예측이 오늘날의 현실이 되었다. 자본 수익은 노동 수익을 위태롭게 하고 대체하려 한다. 흔히 경제 체계에서 얻는 주요 이윤에서 노동 수익은 말단에만 자리한다. 결과적으로 노동 자체와 그 품위는 인간을 위한 “선”30) 으로서 그 가치를 잃어버릴 위험이 증가하고 있으며 불공정한 사회관계 안에서 단지 교환의 수단만 되어 버린다.
바로 이렇게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 선으로서의 노동이 ‘수단’이 되고 수단으로서의 돈이 ‘목적’이 될 때, 무분별하고 비도덕적인 “버리는 문화”가 확산된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소외되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빼앗기고 “희망도, 현실을 벗어날 방법도 없이” 버려진다. “이제는 문제가 단순히 착취와 억압 현상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다. 배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배척된 이들은 더 이상 사회의 최하층이나 주변인이나 힘없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착취된’ 이들이 아니라 쫓겨난 이들, ‘버려진’ 사람들이다.”31)
16.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신용 거래의 대체 불가능한 사회적 기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유능하고 믿을 만한 금융 중개 기관들이 이를 수행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채무자에게 그의 실제 능력 이상으로 지나치게 높은 금리를 적용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경제 체계에 해로운 거래가 된다. 언제나 인간의 양심은 고리대금업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관행을 부당한 것으로 인지하고, 이는 경제 체계의 순기능에 역행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여기서 금융 활동의 으뜸 소명은 실물 경제를 위해 봉사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금융 활동은 도덕적으로 합당한 수단들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원칙에 따른 부의 선순환을 위해 자본의 분배를 촉진하여야 한다.32) 예를 들어, 이러한 점에서 가정과 기업과 지역 공동체를 돕는 신용 보증과 개발도상국을 돕는 신용 거래와 마찬가지로 신용 협동조합과 무담보 소액 대출과 같은 실재들은 매우 긍정적이고 고무적이다.
특히 돈의 긍정적 잠재력이 최대한 실현될 수 있는 이러한 맥락에서, 주로 투기적 목적으로 신용을 이용함으로써 시민 사회에서 창출된 신용을 부당한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은 명백히 도덕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17. 단순히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불평등을 이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곧,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히면서 엄청난 이득을 취하거나, 부당하게 다른 이에게 불이익을 줌으로써 자기 이윤을 챙기려고 자신의 우세한 지위를 남용하거나, 공동체의 선익에 해를 끼치고 방해하면서 자신의 부를 얻으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33)
그와 같은 관행은 도덕적 관점에서 특히 개탄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중요한 투자 기금에서조차 투기 위험을 무릅쓰고 이득만 취하려는 소수의 의도가34) 순전히 공채 증권 가격의 인위적 삭감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그러하다. 이는 부정적 파급 효과를 초래하거나 국가 전체의 경제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리밸런싱(rebalancing)을 위한 공적 노력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정의 경제 안정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또한 정부 당국이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이는 정치 체계의 올바른 기능을 인위적으로 방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특히 경제-금융 분야에서 발견되는 투기 의도는 오늘날 인간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다른 모든 주요 의도를 대체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시민 사회를 평화로운 공존, 만남, 연대, 새로워진 상호관계, 공동선에 대한 책임의 자리로 만드는 가치들이라는 막대한 유산을 잠식시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효율성’, ‘경쟁’, ‘지도력’, ‘실적’과 같은 단어들이 시민 문화를 온통 점령하여, 결국 교환의 질을 떨어뜨리고 단지 숫자적 계수로만 격하시키고 마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도, 인류의 쇄신을 위한 계획이 요구된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하게 해 주고, 약자를 위한 자리가 마련된 친절하고 포괄적인 사회,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데 부가 쓰이는 사회, 곧 인간이 살기에 아름답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을 건설하게 해 주는 풍성한 가치를 추구하는 지평을 다시 열기 위함이다.
III. 오늘날 상황에서 밝혀야 하는 몇 가지 사안
18. 이러한 의미에서 더욱더 호소력을 지닌 모든 경제와 금융 주체들에게 구체적이고 특별한 윤리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증진함으로써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여는 관점에서 몇 가지 사안들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35)
19. 세계화와 디지털화의 발전 덕분에, 시장은 거대한 유기체로 비유될 수 있으며, 그 핏줄을 통해 생명의 자양분처럼 엄청나게 많은 돈이 흐른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시장의 수단과 구조가 잘 운영되고, 부의 성장과 분배가 나란히 이루어질 때, 그와 같은 유기체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체계의 건강은 행해지는 모든 개별 행동의 건강에 달려 있다. 건강한 시장 체계에서는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존중하고 증진하는 것이 더욱 수월하다.
상대적으로, 부의 성장과 분배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여 체계적 문제와 위기를 조장하는 신뢰하기 어려운 경제-금융 수단들이 도입되고 확산될 때마다, 이러한 시장 유기체에 ‘독’이 될 수 있다.
건강한 체계를 유지하고 부정적인 부작용을 방지하려면 공권력이 금융 혁신으로 만든 모든 상품을 보증해야 한다는 요구를 오늘날 점점 더 절실하게 깨닫는다. 건강한 경제를 증진하고 부패를 피하라는 것은 시장에 종사하는 모든 이해 당사자를 향한 피할 수 없는 도덕적 명령이다. 또한 이러한 요구는 다양한 지역 금융 체계들 사이의 초국가적 협력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보여 준다.36)
20. 그와 같은 건강은 그 자체로 자원의 증가와 다양성을 가져오고, 이는 경제와 금융의 ‘생생한 다양성’을 이룬다. 이러한 생생한 다양성은 경제 체계에 부가 가치가 되고, 적절한 경제-금융 정책을 통해서도 옹호되고 지켜져야 한다. 이는 시장에 풍요롭고도 다양한 성격의 많은 건강한 수단들과 주체들의 존재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이 다양성은 긍정의 방식으로는 그들의 행위를 지지하고, 부정의 방식으로는 부를 창출하고 분배하는 체계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모든 이들을 저지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건강한 방법으로 시장 내에서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과제는 협력의 고유한 기능으로 실현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주체들의 충실하고 강력한 상승효과는 모든 경제 성장이 목표로 하는 잉여 가치를 만든다.37)
인간이 자신과 온 인류를 결합시키는 근본적 연대를 인식할 때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화는 자신만을 위해 아껴 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대의 삶이 습관화 될 때, 소유한 재화는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몇 배로 불어나 다른 이를 위해서도 예기치 않은 결실을 맺는 데에 사용된다.38) 여기서 우리는 확실히 “재화의 분배나 증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빵, 새로운 재화, 새로운 더욱 큰 선의 창조”를 함께 나누는 법을 알 수 있다.39)
21.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이 분명히 보여 주듯, 한편으로 시장은 모든 윤리와 무관하게 당연히 자급자족한다는 믿음은 매우 순진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장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보호를 동시에 보장하고, 특히 더욱 취약한 이들이 건강하고 올바른 상호교류를 이루도록 해 주는 적절한 시장 규제가 시급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 권력과 경제-금융 권력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고 자율적이며 동시에 다가오는 모든 위험을 피하고 소수의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 아닌 기본적으로 공익이 실현되는 쪽으로 향해야 한다.40)
가장 최근 경제 위기의 주요 원인들 가운데에 금융계 주체들의 비윤리적 행위도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경제 체계의 초국가적 차원이 개별 국가가 세운 규정을 쉽게 회피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러한 규제가 더욱더 필수적이다. 더구나 금융계에서 통용되는 자본 투자의 극명한 변동성과 유동성 때문에, 이러한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즉각적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모든 규범을 피해서, 종종 심지어 합법적 정치 권력의 유리한 입장을 이용한 협박으로 자본을 용이하게 좌지우지할 수 있다.
따라서 시장은 견고하고 튼튼한 지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곧, 거시적으로 건전할 뿐만 아니라 규범적인 지침, 최대한 공유하면서도 일관된 지침이 필요하다. 또한 시장의 유동성에 대응할 수 있는 지속적으로 쇄신된 규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지침은 모든 경제-금융 상품, 특히 더욱 체계적인 경제-금융 상품의 품질과 신용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보장해야 한다. 또한 빠른 속도의 혁신 과정이 지나친 체계적 위험을 초래할 때에, 경제 운용자들은 공동선이 요구하는 의무와 한계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이루어지는 금융 체계의 세계화 때문에 여러 국가 시장 규제 권위들 사이에 안정적이고 명확하고 효과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또한 공동선에 대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필요하다면 때로는 즉각적으로 함께 법적 구속력을 지니는 결정을 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규제 권위들은 언제나 독립적이어야만 하며 긴급히 요구되는 형평성과 공익을 따라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길 수 있는 어려움 때문에 여러 국가들 사이에 통합되면서도 초국가적 차원에서 합의된 규범 체계를 찾고 실행하는 것을 막으면 안 된다.41)
이러한 규정은, 모든 형태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제거하여 거래에서 형평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목적에 따라, 거래되는 모든 것에서 완전한 투명성을 지지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정보와 권력의 불균등한 집중은 더욱 강력한 경제 주체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어 시장뿐만 아니라 정치와 규범 체계에도 편파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패권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대규모 규제 완화가 시행되는 곳에서, 규범과 제도의 공백은 자명한 결과이다. 곧, 그 공백은 도덕적 위험과 횡령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시장의 비이성적인 과열 상승의 여지를 만들어, 먼저 투기 거품이 일어나고 그 다음으로 급작스럽고 파괴적인 몰락과 체계 위기가 따르게 된다.42)
22. 신용 은행 중개 기관들을 위하여, 일반 신용과 저축 운용 활동 그리고 투자와 단순 사업 활동이라는 두 영역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구분이 있다면, 체계 위기는 더욱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다.43) 이는 가능한 금융 불안정의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또한 건강한 금융 체계는 가능한 최대한의 정보를 요구하기에 모든 주체는 온전하고 의식적인 자유로 자신의 이윤을 보호할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의 자본이 투기 목적으로 사용되는지 아닌지를 알고, 또 자신이 계약하는 금융 상품의 적절한 가격과 위험 정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저축, 특히 가계 저축은 보호해야 하는 공공 재산이고 위험에 대비한 최적화를 추구한다. 그러한 저축을 금융 자문 전문가의 손에 맡길 때에는 단순한 운용만이 아니라 올바른 관리가 요구된다.
저축 운용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금융 자문의 활동 가운데 다음의 경우들을 유념해야 한다. 은행이나 다른 금융 중개 기관에 대한 수수료를 통해 생기는 수익을 늘리려는 흔한 목적을 지니고 투자 포트폴리오를 과도히 변동시키는 경우, 고객의 요구에 더욱 잘 맞는 더 좋은 다른 상품들이 있는데도 일부 은행과 뇌물수수 형태로 결탁하여 저축 수단들의 제공에 마땅히 따라야 하는 공정성이 결여된 경우, 금융 자문이 자기 고객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관계된 이윤을 보호하는 것에서 적절한 성실함의 결여나 심지어 고의적 태만을 보이는 경우, 또한 은행 중개 기관이 고객에게는 불리하더라도 자기들이 출시한 다른 금융 상품의 동시 판매를 위하여 자금 조달을 허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23. 모든 기업은 중요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적절한 문화와 관행을 지니는 참된 사회 중개 단체를 대표한다. 그와 같은 문화와 관행은 기업의 내부 조직을 결정하는 반면에 기업 활동이 이루어지는 사회 조직에도 영향을 준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는 기업 안에서(ad intra)나 기업 밖에서(ad extra)나 분명히 드러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준다.44)
이러한 의미에서, 단지 이윤만이 금융 기업 문화의 최종 목적이고 공동선의 실질적 요구는 무시되는 곳에서, 모든 윤리적 주장은 실질적으로 기업 행위와 무관하며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이는 심지어 명성 있는 경영 교육 과정에서도 공공연한 사실로 제시되고 있다. 조직의 논리에서 이러한 형태의 기업 목표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은 응징적 수준과 직업 인식의 차원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는 더욱 크게 부각된다. 이러한 경우, 단순한 이윤 추구의 목적은 쉽사리 왜곡되고 선별적인 논리를 만든다. 이러한 논리는 종종, 유능하지만 탐욕적이고 비양심적이며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주로 이기적이고 사적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이 기업의 지도자 자리에 오르는 것을 부추긴다.
또한, 그와 같은 논리는 회사의 건강한 경제를 증진시키는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주주들의 이윤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경제 정책을 세우는 경영을 촉진한다. 그래서 그 회사와 소비자들과 다양한 지역 공동체들(이해 당사자)에 혜택이 되는 업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이들이 받게 되는 합법적인 이득에 피해를 준다. 이는 종종 운용의 즉각적 결과에 비례하여 커다란 보상으로 장려되지만,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제재도 받게 된다. 단기간 경영자와 주주들에게 더 큰 소득을 보장하지만, 결국 과도한 위험 부담을 지게 되어 회사는 약해지고 미래에 대한 적절한 기대를 보장해 줄 수 있었던 경제 에너지도 고갈되어 버린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쉽게 심각한 비도덕적 문화를 조장하고 확산시킨다. 이러한 문화에서 예측되는 혜택이 예상되는 제재보다 크면 사람들은 종종 주저 없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한 행동은 건강한 모든 경제-사회 체계를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이는 건강한 모든 경제-사회 체계의 기능을 위협하고, 모든 형태의 사회 제도의 필수적인 근간이 되는 공동선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데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 관한 성실한 자기비판과 추세 전환이 시급하다. 공동선을 구축하는 모든 요소들을 고려하는 기업 금융 문화를 촉진하여야 한다. 이는 예를 들어,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관계의 질을 기업 문화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모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기업의 이러한 사회적 책임은 단지 가끔씩 있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의 모든 행위 내부에서부터 면면히 퍼져 나가 이를 활기차게 하며 사회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이윤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 다시 말해서 모든 경제 체계에 본래의 필수 요소인 이윤과 모든 형태의 시민 공존에 필수 요소인 사회적 책임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순환성이 그 완전한 결실을 드러내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과 공동선을 존중하는 윤리 그리고 모든 경제 금융 체계의 실질적인 기능 사이의 와해될 수 없는 연결, 죄가 숨기려 하는 그 연결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이러한 선순환은 기업의 종사자들에게 더 큰 내적인 동기를 부여할 때처럼, 이해 당사자들과의 갈등의 위험을 줄이는 과정에서 촉진된다.
여기서 경제 금융 체계의 으뜸 목적인 부가가치 창출은 바로 공동선의 진실된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견고한 윤리 체계 안에서도 실행 가능하다는 것을 온전히 보여 주어야 한다. 경제적 명분과 윤리적 대의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인식하고 실행할 때에 비로소 모든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선을 가져올 수 있다.45) 따라서, 시장이 제 기능을 하려면 인간학적이고 윤리적인 필수조건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수조건들은 시장이 홀로 조성할 수도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24. 한편으로, 신용 가치는 불건전한 결탁으로부터 안전하고 혁신의 역량을 지닌 실제로 가치 있는 수혜자를 알아보는 신중한 선별 활동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은행들도 맞닥뜨린 위험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려면 적절한 자산을 소유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손실의 결과적 사회화를 최대한 제한하고 누구보다도 그 손실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이 이를 부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확실히 저축에 대한 세심한 관리에는, 올바른 법적 규제 외에도, 윤리적 관점에서 은행과 고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중한 재검토 관행과 모든 관련 거래의 합법성을 지속적으로 보호하는 관행과 더불어 적절한 문화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러한 선상에서, 경영이사회를 지원하고자 은행 안에 윤리위원회를 설립하자는 흥미로운 제안을 시도해 볼 만하다. 이는 은행의 대차 대조가 손해와 손실의 결과를 내지 않도록 방지하고 합법적 임무와 금융 관행 사이에 효과적인 일관성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실물 경제를 적절히 뒷받침하도록 은행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25. 고위험 신용 증권을 만드는 일은 -이는 사실 적절한 품질 규제나 올바른 신용 평가 없이 일종의 허구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 중개자들을 부유하게 만들지만 이를 회수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손해를 끼쳐 파산으로 이어지기 쉽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이는 이러한 증권의 위험성에 대한 부담이 그 증권을 발행한 기관에서 그것이 확산되고 배분되는 시장으로 전가될 때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s) 증권이 그러하다. 이러한 관행은 광범위한 피해와 잠정적으로 체계적 어려움을 초래한다. 그와 같은 시장의 조작은 꼭 필요한 경제-금융 체계의 건강과 상반되며 공동선을 존중하는 윤리적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다.
모든 신용 증권은 확인이 어려운 추정 가치가 아니라 잠재적 실제 가치와 일치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공적 규제와 함께, 왜곡된 행동을 처벌하고 소수에 의한 위험한 과점이 생겨나지 않게 방지하는 법적 수단을 통하여 신용 평가 주체들의 활동을 공정하게(super partes) 사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더 시급하게 요구된다. 이는 부여받은 신용 책임이 최초의 채권자에게서 그것을 인수하는 사람에게 전가되는 신용 중개 체계에서 더욱 그러하다.
26. 일부 금융 상품, 그중에서도 이른바 ‘파생상품’은 특정 운용들에 내재한 위험에 대비하는 보장 보험의 목적으로 생겨났다. 흔히 그러한 운용들은 그 내재적 위험에 따른 추정 가치를 기초로 하는 도박성을 포함한다. 그와 같은 금융 수단들은 계약을 바탕으로 성립되고, 그 계약을 통하여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보험으로 대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위험을 다시 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파생상품 (특히 이른바 유동화) 형태에서는 최초 구조에서 시작되고 식별 가능한 금융 투자와 연결되어 더욱더 복잡한 구조(유동화의 유동화)가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복잡한 구조 안에서 이러한 거래가 너무도 변화무쌍하게 이루어져 그 근본적 가치를 합리적이고도 공평하게 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져 거의 불가능할 정도에 이른다. 이는 이러한 매매의 모든 경로가, 그 안에서 금융 수단이 위험을 방어해야 함에도, 오히려 당사자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실상 그러한 위험의 실제적 가치를 왜곡한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이 최근 금융 위기의 주요 원인인 투기 거품의 팽창을 조장해 왔다.
확신하던 투명성의 꾸준한 저하처럼, 초기 운용에서는 아직 드러나지 않던 이러한 파생상품들을 둘러싼 불확실성 때문에, 진리와 공동선을 존중하는 윤리의 관점에서는 계속해서 점점 더 그 상품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는 점이 명백하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그 파생상품들을 조만간 폭발하려는 일종의 시한폭탄으로 바꾸어 버려 언제든 이 상품들에 대한 경제적 불신을 촉발시키고 시장 건전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규제가 완화된 (장외) 시장에서 이러한 파생상품들이 거래될수록 또 규제되는 시장에 비해 사기는 아니라도 요행에 노출될수록, 윤리의 결여가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상품들은 실물 경제에 대한 투자와 회생 방편을 앗아가 버린다.
이와 비슷한 윤리적 평가가 신용 부도 스와프(Credit Default Swap: CDS, 이는 특히 파산의 위험에 대비한 보험 계약이다.)의 이용에도 적용될 수 있다. CDS는 제삼자의 파산 위험, 심지어 일찍이 신용 위기를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이들의 파산 위험을 놓고 돈을 거는 것을 허용하고, 동일 사안에 대하여 정상적인 보험 조약으로는 절대 승인될 수 없는 이와 같은 운용을 되풀이하는 것도 실제로 허용한다.
2007년 경제 위기 직전에 CDS 시장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과 충분히 맞먹을 정도로 호황을 이루고 있었다. 적절한 제약을 받지 않은 이러한 계약의 확산은 사행적이고 타인의 실패에 돈을 거는 금융의 성장을 조장했다. 이는 윤리적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신용 위기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수단을 획득하는 과정은, 개개인이 다른 경제 주체들의 몰락에 관심을 증대시키기 시작하고 심지어 직접 이에 관여하고자 결심하기도 하는 독특한 사례를 만들어 낸다.
그러한 가능성은 한편으로 행위자가 일종의 경제적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는 시각으로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윤리적 관점에서 특히 개탄스러운 사건을 만들어 낸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신뢰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이 명백하다. 그러한 신뢰가 결여된 경제 체제는 스스로에게 방해물이 되기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부정적 사건이 경제 체제가 건강하게 기능하는 데에 얼마나 해를 끼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투기로 온 나라와 수백 만 가정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때 우리는 지극히 비윤리적인 행위들에 직면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미 일부 국가들에서 시행하고 있듯이 위반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면서 그러한 형태의 거래들에 대한 제재를 확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7. 금융 시장을 지배하는 역동성의 취약점은 은행 간 거래(LIBOR: 리보) 금리의 (고정) 수준에 있다. 이 리보 금리 수치는 은행들이 다루는 여러 통화의 공식 환율뿐 아니라 화폐 시장의 이율에 대한 지표가 된다.
이들은 경제 금융 체계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율 수치에 기초하여 계약을 맺는 당사자 사이의 막대한 화폐 이동에 날마다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율 수치를 조작하는 행위는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하는 심각한 윤리적 위반이 된다.
이러한 조작이 오랫동안 아무런 처벌 없이 자행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규제들로 충분히 통제되지 않고 이해 당사자들이 흔히 마주하는 위반에 합당한 제재가 결여된 금융 체계가 얼마나 취약하고 사기에 노출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 금리 수준을 올바로 고정하는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묵인이라는 실질적인 ‘카르텔’의 수립은 특히 공동선을 훼손하는 범죄 연합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러한 연합은 경제 체계의 건전성에 치명적 손상을 입힌다. 이는 적절한 형벌로 처벌되어야 하며 재발되지 않게 억눌러야 한다.
28. 오늘날 금융계 안에서 운용의 주요 주체 특히 은행은 준법 기능의 보장, 다시 말해 의사 결정 과정의 주요 단계와 회사가 공급하는 주요 상품의 합법성에 대한 자체 감독의 기능을 보장하는 내부 기구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아주 최근까지 경제 금융 체계의 관행은 흔히 주로 준법 기능에 대한 순전히 ‘부정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현행법이 정한 한계에 대한 단순히 형식적인 준수에 기반하여 이루어졌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여기에서 규범적 규제들을 교묘히 피해 가는 빈번한 관행, 곧 제제를 피하고자 규범 그 자체에는 명백하게 모순되지 않으면서 규범적 원칙들을 비껴가고자 하는 잦은 행동들이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행을 막으려면, 준법 기능에 대해 판단할 때 ‘긍정적’ 관점에서도 다양한 운용들의 실체를 살펴보고 그러한 운용들이 현행 규범을 이루는 원칙들과 효과적으로 일치하는지 증명할 필요가 있다. 다수에 따르면, 윤리위원회를 설립하고 이 위원회가 경영이사회와 함께 운영되도록 돕는다면 이러한 방식의 기능 수행을 증진할 수 있다. 이 위원회는 은행의 구체적 기능 안에서 은행의 행동이 현행 규범에 일치하도록 보장해야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자연 교섭 기구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와 비슷한 일치 여부를 판단하도록 촉진하는 지침들을 사내에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여 어떤 운용이 합법적인 틀 아래 기술적으로 달성될 수 있고 실제로 윤리적 관점에서도 적법하고 실용적인지 식별할 수 있게 해야 한다(예를 들어, 바로 조세 회피 관행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제기되는 문제). 그러한 방식으로 단순히 형식적인 준수를 넘어 규제에 대한 실질적인 존중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아가 금융계는 심지어 규범적 규제 체계 안에도 다음과 같은 일반 조항을 예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조항은 자산에 대한 최종 책임이 모든 원인 제공자에게 있음과 함께, 특히 현행 규범을 비껴가는 것을 뚜렷한 목적으로 하는 그들 행위가 불법임을 규정한다.
29. 담보 금융 체계(그림자 금융 체계)의 확산과 같은 특정한 세계적 현상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들 안에는, 그 운영에서 즉각적으로 비판할 만한 점은 드러나지 않는 중개 기관의 형태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그렇다 하여도 실제로는 다양한 국가 감독 권위들이 금융 체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끔 이끌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들은 금융 자원 투자의 일차 목표가 약탈은 아니어도 무엇보다 투기적 성격을 띠며 실물 경제에 봉사하지 않는 이른바 창조 금융(creative financing)의 이용을 무분별하게 촉진해 왔다. 예컨대 이러한 ‘그림자’ 체계의 존재는 2007년 여름에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시작된 최근의 경제 금융 위기의 심화와 국제적 확산에 일조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라는 데에 다수가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