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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제53차 홍보 주일 교황 담화
  • 작성일2019/05/23 15:46
  • 조회 1,919
2019년 제53차 홍보 주일 교황 담화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에페 4,25)
소셜 네트워크 커뮤니티에서 인간 공동체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교회는 언제나 사람들의 만남과 모든 이의 연대에 보탬이 되는 인터넷 사용을 촉진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저는 이 담화를 통하여 다시 한번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관계를 맺는 존재’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그 토대와 중요성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상황이 시사하는 방대한 도전들 가운데에서 홀로 되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의 갈망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물망’과 ‘공동체’의 비유

오늘날 미디어 환경은 이제 일상생활 영역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통신망(Net)은 우리 시대의 자원입니다. 통신망은 한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지식과 관계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전문가들은 콘텐츠의 생산과 유포와 활용 과정에서 기술이 가져다 준 중대한 변화와 관련하여 여러 위험 요인들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 요인들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진짜 정보의 검색과 공유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은 지식 접근의 특별한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또 한편, 인터넷은 특정 사실과 인간관계를 표적으로 삼아 이따금 불신을 조장하려는 의도적인 왜곡과 허위 정보에 많이 노출된 분야인 것도 사실입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한편으로 우리가 서로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서로를 더 잘 알며 서로 도움을 주게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개인과 그 권리들을 마땅히 존중하지 않고, 정치나 경제의 차원에서 이득을 꾀하려는 목적으로 개인 정보를 조작하여 사용하는 데에도 일조하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젊은이 네 명 중 한 명은 사이버 폭력(cyberbullying) 사건에 연루되어 있습니다.1)

이 복잡한 상황에서, 처음부터 인터넷의 바탕이 된 그물망(net)의 비유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해 보고 그 긍정적인 잠재력을 재발견해 보는 것도 유용할 것입니다. 그물망의 이미지는 다양성에 대해 성찰해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물망은 선들과 매듭으로 이루어진 그 다양성 덕분에, 위계 형태에 속하는 구조, 수직 형태에 속하는 조직 없이도 그 안정성이 보장됩니다. 모든 요소의 공동 참여 덕분에 그물망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그물망의 비유는 의미가 풍부한 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바로 공동체(community)입니다. 화합하고 연대하며 신뢰하고 같은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공동체일수록 더욱더 힘 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연대의 그물망을 이룬 공동체는 책임 있는 언어 사용을 바탕으로 하는 상호 경청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상황에서 소셜 네트워크 커뮤니티가 공동체와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가상 커뮤니티들이 화합과 연대를 입증하는 매우 좋은 사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상 커뮤니티들은, 그저 개개인이 공동 관심사나 이해관계에 따라 모인 집단으로서 약한 유대감을 특징으로 합니다. 또한 소셜 웹(social web)상에서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 곧 그룹과 무관한 사람과 비교하여 대조적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의할 때에,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보다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인종, 성, 종교 등에 대하여)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온갖 편견의 분출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성을 배척하는 그룹들, 심지어 디지털 환경에서도 무분별한 개인주의를 부추겨 때로는 증오의 소용돌이를 일게 하는 그런 그룹들을 조장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한 창(窓)이 되어야 할 자리가 개인의 자아도취를 과시하는 진열장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통신망은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증진하는 기회가 됩니다. 반면에, 우리를 옭아매는 거미줄처럼 우리의 자기 고립을 심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소셜 웹이 관계적 측면에서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망상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결국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된 ‘사회적 은둔자’로 전락해 버리는 위험한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 역학 관계는 사회 관계망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다면적이고 위험한 현실은 다양한 윤리적, 사회적, 법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을 야기하며 교회에도 도전 과제를 제기합니다. 각국 정부들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안전한 네트워크라는 본연의 전망을 지켜나가고자 법적 규제 장치들을 강구하고 있지만, 네크워크가 긍정적으로 이용되도록 북돋워야 하는 책임과 또 그 가능성은 우리 모두에게도 있습니다.

접속의 증대만으로는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온라인 네트워크에서도 서로를 향한 책임을 깨달아 공동체의 참다운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몸과 지체에 관한 세 번째 비유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응답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몸과 지체에 관한 비유를 들어, 하나 되게 하는 유기체를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에페 4,25). 서로 지체라는 것, 바로 이 심오한 동기를 들어 바오로 사도는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실을 말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진실을 지켜야 하는 의무는, 친교의 상호 관계를 거짓 없이 드러내어야 할 필요성에서 생겨납니다. 실제로 진실은 친교 안에서 드러납니다. 한편, 거짓은 우리가 한 몸의 지체임을 이기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거짓은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 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유일한 방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몸과 지체의 비유는, 우리 정체성이 친교와 ‘서로 다름’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성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모두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임을 압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우리 원수들마저도 인격적 존재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줍니다.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데에는 더 이상 적대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배우는 포용의 눈길은 서로 다름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곧 서로 다름이 관계와 친밀함의 필수 요소이자 조건임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 개인들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위한 이러한 능력은 하느님 위격들 사이에 이루는 사랑의 친교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독이 아니라 친교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또한 그러시기에 소통이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더욱이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소통하시고자 또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시고자 우리 언어를 취하시어 역사 안에서 인류와 참되고 고유한 대화를 이루어 주셨습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2항 참조)

친교를 누리는 삶에 대한 동경,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동경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친교이시고 자기 전달이신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분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만큼 우리 본성에 맞갖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2)

현재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관계에 노력을 기울이고, 인간의 관계적 본성을 네트워크 안에서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옹호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그러한 친교를 보여 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은 그 자체로 관계이며 만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의 이끄심으로, 우리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다른 이의 선물을 이해하며 그 선물에 알맞게 보답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모습대로 친교는 바로 개인과 인격체를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내가 나다우려면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이와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나는 참된 인간, 참된 인격적 존재가 됩니다. 사실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는 인간 존재를 ‘얼굴’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존재입니다. 우리 삶이 개별적인 특성에서 벗어나 인격적인 특성으로 나아갈수록 인간적으로 성숙한 삶이 됩니다. 더 인간다워질 수 있는 참된 길은,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인식하는 개별적 존재에서 벗어나 길동무로 인정하는 인격적 존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좋아요’에서 ‘아멘’으로

몸과 지체들의 이미지는 소셜 웹의 이용이 몸과 마음, 눈과 눈길과 숨결을 통해 살아 있는 살과 뼈로 이루어진 만남을 보완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통신망이 그런 만남의 연장이나 기대로 이용될 때, 통신망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늘 친교의 자원이 됩니다. 한 가족이 통신망을 활용하여 더욱 친밀해지고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 통신망은 친교의 자원이 됩니다. 교회 공동체가 네트워크를 통해 활동을 계획하고 성찬례를 함께 거행할 때, 네트워크는 친교의 자원이 됩니다. 통신망을 통해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이들의 미덕이나 아픔에 관한 이야기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을 재발견하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선을 추구할 때, 통신망은 친교의 자원이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진단에서 치유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곧 대화와 만남과 미소와 다정한 표현을 향한 길을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네트워크입니다. 네트워크는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친교를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성찬 친교로 엮어진 네트워크입니다. 성찬 친교에서는 ‘좋아요’가 아니라 진리, ‘아멘’을 바탕으로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아멘’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하고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티칸에서
2019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1) 이러한 현상의 방지를 위하여, 국제 사이버폭력 예방 기구(International Observatory for Cyberbullying Prevention) 본부가 바티칸에 설립될 예정이다.

2) 성 바실리오, ‘대규칙서’(Regulae fusius tractatae), III, 1: 『그리스 교부 총서』(PG) 31, 917; 참조: 베네딕토 16세, 제43차 홍보 주일 담화, 2009.5.24.,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40호(200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69면.

원문 Messaggio del Santo Padre Francesco per la 53ma Giornata Mondiale delle Comunicazioni Sociali, ≪“Siamo membra gli uni degli altri”(Ef 4,25). Dalle social network communities alla comunita umana≫, 2019.1.24. 영어, 이탈리아어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