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화] 2019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
- 작성일2019/06/1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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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시작된 평화의 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한 해 우리는 새로운 평화의 바람을 마주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남북 정상 간 이루어진 세 차례의 만남과 더불어 ‘판문점 선언’과 ‘평양 선언’이 이어졌고, 북미 정상 간에도 두 차례의 회담이 진행되었습니다. 핵무기의 확산과 미사일 시험 등으로 전쟁의 위기가 감돌던 한반도에서 아무도 기대하지 못하였던 변화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너무 긴 시간 동안 분단으로 고통받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이후, 한반도에 불었던 거센 평화의 바람이 잦아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성과 없이 끝난 회담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비핵화와 경제 제재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대화를 이어 가던 남북 관계까지도 소원해진 것처럼 보이는 현재 상황에서는 한반도가 다시 이전의 대결 구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렇게 북한과 미국 그리고 남한 또한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대 구도의 해소를 위한 과제는 비핵화만이 아닙니다. 사실 북미 관계가 개선되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려면, 지금 당장 문제가 되고 있는 현안들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미국이나 국제 사회의 평가라는 더욱 근본적인 도전이 존재함을 깨닫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 속에서도 평화의 길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분단과 한국 전쟁, 첨예한 냉전의 시대를 보내야 하였던 이 땅에서, 오랜 세월 두려워하였던 마음과 적대하였던 갈등의 구조가 쉽게 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한반도의 상황에서 화해와 일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시작된 평화의 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마른 뼈들에게도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죄의 무덤에서 구해 내시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모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에제 37장 참조).
분열의 죄와 약자들의 고통
많은 이들이 여전히 북한 정권의 ‘의도’를 의심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올해 북한에서 식량난으로 기아가 발생할 것이라는 소식도 남한 사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북한 주민들이 겪게 될 굶주림과 고통을 걱정하기보다는 국제기구나 정부의 지원 계획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인도적 지원이 마치 ‘이적(利敵)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묻는 율법 교사처럼 아직 남한 사회에는 북한을 형제나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과잉된 공포와 증오가 일상화된 적대적인 분단 구조 안에서는 상대를 선의(善意)로 대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갈라진 형제를 적으로 규정하는 우리 민족의 아픔은, 분열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선과는 반대되는 악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상대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열의 죄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불순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3장; 4장; 11장 참조). 그리고 이 비구원의 상황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분열의 죄와 긴밀하게 연결된 한반도의 분단 체제는 특히 힘없는 약자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줍니다. 사실 북핵 문제는 한국 전쟁을 종전하지 못한 전쟁의 당사자들이 수십 년을 지속해 온 대결 구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북한의 취약 계층을 비롯한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동북아시아를 넘어서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고 미국과 국제 사회는 강력한 경제 제재를 취하고 있지만, 수십 년을 이어 온 제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사회 교리는 경제적인 제재 때문에 고통받게 될 빈곤층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면서, “경제적 제재는 지극히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수단이며, 엄격한 합법적 윤리적 기준을 따라야 한다.”(『간추린 사회 교리』, 507항)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경제 봉쇄의 기간이 한정적이어야 하고 그에 따른 효과도 뚜렷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제재’가 필요한 경우를 인정하지만, 그 평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핵 문제와 더불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가 겪고 있는 군비 경쟁의 딜레마도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구조적인 악입니다.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냉전적 대결 구도는 이 지역을 지구상에서 군비 경쟁이 가장 심각한 곳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안보를 위해서는 더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로 끝없이 진행되는 군비 경쟁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 쓰여야 하는 재화를 낭비합니다. 환경 보존과 세계 발전을 위하여 봉사해야 할 인류의 노고가 피조물들을 파괴하는 무기 경쟁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군비 경쟁에 관해서 “인류에게 막심한 상처를 주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도록 해치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29항)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구체적인 군비 축소 조치만이 국가 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508항 참조).
최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국제 사회의 현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의 논리가 더 위세를 떨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무력에 의한 평화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언젠가 반드시 완성될 ‘예루살렘의 평화’는 결코 군사 무기와 전쟁 연습을 통하여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미카 4,3 참조).
평화의 사명과 한반도 평화 기원 미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를 이룬 교회는 이 땅에서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5,19; 『간추린 사회 교리』, 517항 참조). 그리스도의 평화를 믿는 우리 신앙인들은 화해가 간절한 한반도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평화 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대립하는 갈등 구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어느 한쪽 편만이 아니라 당사자들 모두가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그들’만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도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가 일치의 원리로 설명하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도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중요한 덕목이 됩니다(로마 12,4-8 참조).
따라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상대를 인정하고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화해 교육, 평화 교육 등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냉전의 시대에서 성장한 기성세대뿐 아니라, 경쟁 사회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도 지속적인 평화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가르쳐야 하는 신앙 교육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화해의 사명을 가진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신앙 안에서 평화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는 아직 서로를 악마로 만들었던 냉전의 잔재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이어 온 적대를 끝내고 상대를 인정할 수 있는 평화로 나아가야 하는 기회의 시간을 식별하면서 지금 우리 교회는 평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에 투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평화를 포기하지 않고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오는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 누리 공원에서 ‘한반도 평화 기원 미사’가 봉헌됩니다.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이 공동 집전하게 될 이 미사는 현재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하여 한국 교회 전체가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교황님의 방북을 기원하면서 민족의 화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이 미사에 많은 신자들이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은총을 허락하실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합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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