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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 주일’ 제정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자의 교서 형태의 교황 교서
  • 작성일2019/10/2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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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9년 9월 30일에 자의 교서 형태의 교황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를 발표하시며연중 제3주일을 ‘Sunday of the Word of God’로 제정하셨습니다이에 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이 주일의 우리말 명칭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정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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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 주일’ 제정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자의 교서 형태의 교황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


1.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이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행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빵을 나누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두려움과 당혹감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파스카 신비의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회개와 죄의 용서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루카 24,26.46-47 참조).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구원 신비의 증인이 될 힘을 주실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루카 24,49 참조).

부활하신 주님과 신자 공동체와 성경이 이루는 관계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본질입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는 주님께서 안 계신다면,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참으로 그러합니다. 곧, 성경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그분 교회의 사명에 따른 여러 사건들은 이해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니모 성인은 다음과 같은 합당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이사야서 주해」[Commentarii in Isaiam], 서문, 『라틴 교부 총서』[Patrologia Latina: PL] 24,17).

2.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마치며, 저는 “주일 가운데 하루”를 정해서 “그 주일을 온전히 하느님 말씀에 바쳐 주님과 주님의 백성이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에서 샘솟는 마르지 않는 부요를 이해하게 해야 한다.”(교황 교서 「자비와 비참」[Misericordia et Misera], 7항)라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전례 주년의 주일 가운데 하루를 하느님 말씀에 특별한 방식으로 봉헌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당신 말씀의 보고를 열어 주시는지 교회는 새롭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움을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프렘 성인의 가르침을 떠올려 봅니다. “주님, 당신의 단 한 말씀이라도 그것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람처럼, 당신 말씀에서 마시는 분량보다 거기에 남겨 두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견해에 따라 많은 가닥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채색하시어, 그 말씀을 고찰하는 사람마다 그 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거기서 풍성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은 그 안에 많은 보화를 숨기셨습니다”(「디아테사론 주해」[Commentarii in Diatessaron], 1,18).

이 교서를 통하여 저는, 그동안 제가 하느님 백성에게 받아 온 수많은 요구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바로, 온 교회가 하나 된 지향으로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거행하게 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오늘날 흔히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 말씀이 지니는 큰 중요성에 관하여 묵상하는 시간을 따로 정해 두곤 합니다. 다양한 지역 교회들은 신자들이 성경에 더 가까이 다가가 이토록 위대한 선물에 더욱 감사하며 날마다 그 가르침을 한결같이 실천하고 증언하도록 돕는 풍성한 계획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에 힘입어, 하느님 말씀을 재발견하는 데에 큰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계시 헌장은 언제나 새롭게 읽고 적용해 볼 만한 문서입니다. 계시 헌장은 성경의 본질, 세세대대로 전달되는 성경(제2장), 하느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성경(제3장), 신구약을 다 아우르는 성경(제4장, 제5장), 그리고 교회 생활을 위한 성경의 중요성(제6장)에 관하여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이 가르침을 발전시켜, 2008년에 “교회 생활과 사명에서 하느님 말씀”을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를 소집하셨고, 이어서 후속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을 발표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 공동체들을 위한 중요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습니다.1) 이 교황 권고는 특히 하느님 말씀의 성사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전례 상황 안에서 하느님 말씀이 지니는 수행적 특성을 각별히 강조합니다. 2)

따라서 주님께서 당신 신부에게 끊임없이 건네시는 그 살아 있는 말씀과 맺는 이 결정적인 관계가 언제나 주님 백성인 우리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의 신부는 더욱 깊은 사랑과 신앙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저는 이 교서를 통하여,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 말씀의 거행과 성찰과 전파를 위하여 봉헌하는 날로 선언합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해마다 우리가 유다인들과 맺는 유대를 강화하고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초대받는 바로 그 기간에 시의적절하게 자리할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시기상의 우연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 거행은 교회 일치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듣는 이들에게 참되고 굳건한 일치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 공동체들은 저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장엄한 날로 지낼 고유한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성찬례 거행에서 성경 봉정을 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의 규범적 가치에 회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에는,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 말씀의 선포를 강조하고, 강론에서도 주님 말씀에 마땅히 드려야 하는 공경을 부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주교들은 독서직 수여 예식 또는 이와 유사하게 독서자 위임식을 거행하여, 전례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선포가 지니는 중요성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종직 또는 비정규 성체 분배자의 경우에 이미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씀의 진정한 선포자 육성을 위한 신자 교육을 마련하고자 다시 한번 새롭게 노력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본당 주임 사제들은 성경 전체 또는 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 하나를 회중 전체에게 제시하는 여러 방법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날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찰하고 기도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 특히 렉시오 디비나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4.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기리는 의미심장한 표시는 율법서를 공적으로 봉독한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서에서 성경은 그 순간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서술합니다. 온 백성이 예루살렘의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유배로 뿔뿔이 흩어졌었지만 이제는 성경을 중심으로 “일제히”(느헤 8,1) 모이게 된 것입니다. 백성은 모두 그 거룩한 책의 봉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느헤 8,3).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일들의 의미를 율법서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 선포를 듣고 커다란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레위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느헤 8,8-10).

이 말에는 큰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단지 일부의 유산도, 소수 특권층을 위한 모음집도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 누구보다도 그 메시지를 듣고 그 말씀 안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성찰해 보도록 부름받은 이들의 것입니다. 이따금 거룩한 책을 특정 부류나 선택된 집단의 것으로 국한시켜 버리면서 거룩한 책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주님 백성의 책입니다. 주님의 백성은 성경에 귀 기울이며, 서로 흩어지고 갈라지는 분열에서 벗어나 일치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이들을 하나로 모아 한 백성이 되게 해 줍니다.

5. 경청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일치 안에서 모든 이가 성경을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중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목자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 백성의 책이기에, 말씀의 봉사자로 부름받은 이들은 자신이 맡은 공동체가 성경에 맛들이게 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특히 강론은 고유한 역할을 합니다. 강론은 “거의 성사나 다름없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간결하고도 적절한 언어로, 듣는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하면서 “주님께서 선의 실천을 독려하시고자 사용하신 형상들의 아름다움”(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42항)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이는 결코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는 사목 기회입니다!

실제로 강론은,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의 아름다움을 접하고 자신의 일상생활을 이에 비추어 보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따라서 강론 준비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독서들에 대한 해설도 즉흥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들은 장황하고 현학적인 강론을 해서도, 주제와 무관한 내용으로 엇나가서도 안 됩니다. 거룩한 본문을 묵상하면서 기도할 때에, 듣는 이들의 마음에 가 닿도록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본질을 전달하여 이를 듣는 이들이 이해하고 열매 맺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1테살 2,13) 들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성경에 전념하는 시간을 갖고 기도합시다.

교리교사들 또한 성경을 가까이하고 연구함으로써,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나게 도와주는 직무를 위하여 스스로를 쇄신할 시급한 필요성을 느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은 듣는 이들이 하느님 말씀과 참 대화를 나누도록 북돋워 줄 수 있습니다.

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문을 잠가 놓고 모여 있던 제자들을 만나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기에 앞서(루카 24,44-45 참조), 이미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루카 24,13-35 참조). 루카 복음사가의 이야기는 이날이 바로 부활 당일 곧 주일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 두 제자는 얼마 전 일어난 일들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의 엠마오 여정은 예수님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슬픔과 실망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실 메시아이시기를 바랐건만, 대신에 십자가 사건을 맞닥뜨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몸소 다정히 그들 곁에 오시어 함께 걸으셨지만 그들은 아직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루카 24,16 참조). 주님께서는 길을 걸으시며 두 제자에게 질문하시고, 그들이 당신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음을 아시고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루카 24,27).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 성경 주석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일은 구약에서 예견되었을 뿐 아니라, 당신 안에서 완성될 단일한 구원 역사가 증명될 수 있도록 그분께서도 친히 그 말씀에 충실하고자 하셨습니다.

7. 성경 곧 거룩한 경전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분을 영광 속에 들어가려면 고난을 겪어야 하는 분이시라고 선포합니다(루카 24,26 참조). 성경의 일부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성경이 없으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가장 오랜 신앙 고백들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신화가 아닌 역사이고 제자들의 신앙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신자들의 믿음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기에(로마 10,17 참조), 믿는 이들은 전례 거행 중에도 또 개인 기도와 성찰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합니다. 

8.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함께하신 ‘여정’은 저녁식사로 마무리됩니다. 이 신비로운 길손께서는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하고 붙드는 그들의 간곡한 요청을 수락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순간에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루카 24,31 참조).

이 장면에서 우리는 성경과 성체성사가 이루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교회는 언제나 성경들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여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특히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식탁에서뿐만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식탁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빵을 취하고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계시 헌장 21항).

꾸준히 성경을 읽고 성찬례 거행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길러 주시는 주님 현존에서 힘을 얻어 역사의 순례길을 걸어가는 한 백성입니다. 성경에 봉헌하는 하루는 그저 하나의 연중행사가 아니라, 한 해 전체를 위한 행사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성경을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 잘 알고 더욱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말씀과 빵을 나누어 주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성경을 꾸준히 가까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형태로 눈이 먼 채, 감은 눈과 냉담한 마음만 지니게 될 뿐입니다.

성경과 성사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룹니다. 성사들이 하느님 말씀으로 시작되고 밝혀질 때에,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 마음과 생각을 여시어 당신의 구원 활동을 깨닫게 해 주시는 그 여정의 목표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요한 묵시록의 가르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그분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을 것을 드실 것입니다(묵시 3,20 참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 마음과 생각의 문을 열면, 그분께서는 우리 삶에 들어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머무실 것입니다.

9. 바오로 성인은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그의 충실한 협력자들에게 끊임없이 성경에 의지하라고 권고합니다. 어느 모로는 바오로의 영적 유언인 이 서간에는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6). 성경의 영감이라는 위대한 주제에 관한 공의회의 계시 헌장은 근본적으로 티모테오에게 전한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에 바탕을 둡니다. 또한 이 권고에서부터 특히 성경의 구원 목적 영적 차원 강생 원리가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계시 헌장은 티모테오에게 보낸 바오로의 권고를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경에 기록되기를 원하신 진리를 확고하고 성실하게 그르침이 없이 가르친다고 고백해야 한다”(계시 헌장 11항). 이처럼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가르침이기에(2티모 3,15 참조), 성경 안에 담긴 진리는 우리 구원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일개 역사서 모음집이나 연대기가 아니라, 그 전체로 개인의 온전한 구원을 목적으로 합니다. 성경의 명백한 역사적 근거 때문에 성경의 근원적 목적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로 이루어진 성경의 본성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 목적을 향하여 모든 것이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 역사 안에서 모든 사람을 만나 악과 죽음에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말씀하시고 활동하십니다.

이러한 구원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성경은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적힌 인간의 말들에서 하느님 말씀으로 변화됩니다(계시 헌장 12항 참조). 성경에서 근본적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활동이 없다면 성경은 그저 기록 문서로만 남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적 해석에 빠져 버리기 십상입니다. 영감을 주는 역동적이고 영성적인 성경 본문이 지니는 특성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이러한 근본주의적 해석을 멀리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되새겨 주듯이,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경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믿음 안에서 체험되고 세세대대로 전해지는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10. 성령의 활동으로 성경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이들 안에서도 활동하십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성령을 통해 쓰인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계시 헌장 12항)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께서는 활동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성경과 다양한 성경 저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감을 불어넣은 것만으로 성령의 활동을 제한한다면, 실제로 성령의 활동을 축소시켜 버리는 해석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신뢰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경을 가르칠 때에, 교도권이 올바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계시 헌장 10항 참조), 그리고 신자들이 저마다 성경을 자신의 영성 생활의 규범으로 삼을 때에, 언제나 성령께서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영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드신 비유들의 의미를 이제 깨달았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다음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11. 계시 헌장에는 또한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전에 영원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인간들을 닮으셨듯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말씀들이 인간의 말과 같아졌다”(13항). 영원하신 말씀의 강생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모든 역사적 문화적 조건 안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성전(聖傳)이 생겨났고, 성전 또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계시 헌장 9항 참조). 성경과 성전이 모두 계시의 한 원천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 둘을 분리해 버릴 위험이 자주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들은 그대로 온전히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또한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은 그 말씀을 수 세기 동안 세세대대로 전달하고 있으며 교회는 그 거룩한 책을 “신앙의 최고 규범”(계시 헌장 21항)으로 삼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경은 문서로 기록되기 이전에 구두로 전해졌으며 한 민족의 신앙을 통하여 생생히 간직되었습니다. 이들은 여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살아가면서도 성경을 자기 민족 고유의 역사이며 정체성의 원천으로 인식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믿음은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을 바탕으로 합니다.

12. 성경을 쓰신 바로 그분이신 성령의 빛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은 늘 새로워집니다. 구약 성경은 결코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일부입니다. 성경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바로 그 한 분이신 성령께서 모든 것을 변모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문서 전체는 말씀에서 자양분을 얻은 사람들의 미래가 아닌 현재에 관한 예언적 기능을 지닙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공생활 초기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말씀으로 자라나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자신들이 만나는 모든 이와 함께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들은 과거에 대한 헛된 향수에 젖어 있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천상의 이상향만 꿈꾸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에 귀 기울이는 이들 안에서 그 예언적 활동을 수행합니다. 성경 말씀은 달지만 쓰기도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 3,3). 요한 복음사가도 파트모스 섬에서 지내고 있을 때에 두루마리를 먹은 에제키엘의 경험을 되살리며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묵시 10,10).

하느님 말씀의 달콤함은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이와 하느님 말씀을 나누고 그 말씀에 담긴 확실한 희망을 선포하도록(1베드 3,15-16 참조)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반대로 하느님 말씀의 쓴맛은, 변함없이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나, 그 말씀이 삶에 무의미하다고 거부되는 것을 개인적으로 경험할 때에 느껴집니다. 우리는 결코 하느님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이루는 관계를 깨닫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려면, 하느님 말씀에서 양분을 얻어야 합니다.

13. 성경이 제기하는 또 다른 도전 과제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당신 자녀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삶은 망설임 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모두에게 내어 주는 하느님 사랑의 충만하고도 완전한 표현입니다. 라자로의 비유에서 우리는 소중한 가르침을 발견합니다. 라자로와 부자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 곁에 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본 부자는 자신의 고통을 형제들도 겪지 않도록 그들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경고를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신랄하게 대답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성경에 귀 기울이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우리 삶 앞에 놓인 커다란 과제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어 우리가 숨 막히고 메마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나눔과 연대의 새로운 길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14.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화들 가운데 하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으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서를 엘리야는 예언서를 상징합니다. 곧, 그들은 성경을 상징합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는 경탄과 기쁨에 휩싸여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그 순간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포로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백성들에게 거룩한 책을 읽어 주었던 초막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주님 수난 사건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을 미리 보여 줍니다. 또한 주님 현존의 상징인, 제자들을 덮은 구름도 이러한 하느님의 영광을 일깨워 줍니다. 이와 유사한 변모가 성경에도 일어납니다. 성경이 믿는 이의 삶의 양식이 될 때에 성경은 그 자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은 다음의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의 여러 의미들 사이의 관계를 재발견하면서, 이제는 문자에서 영으로 건너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 됩니다. 이 전이는 자동적이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자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합니다”(「주님의 말씀」, 38항). 

15.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여정에 주님의 어머니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행복한 분이라고 불리셨습니다(루카 1,45 참조). 성모님의 행복은,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모든 참행복보다도 앞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행복은 다른 모든 참행복을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을 때에 그들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제자이자 스승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이가 열렬히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너희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나의 어머니는 참으로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였기 때문이다. 그녀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만드셨고 그녀의 모태에서 사람이 되신 바로 그 하느님 말씀을 그녀가 간직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요한 복음 강해」[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0,3).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성경을 더욱더 경건하고 친숙하게 대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그 옛날 성경 저자의 가르침을 되새겨봅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로마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19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선종 1600주년,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1)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2010.9.3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1판),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102(2010), 692-787면 참조.

2) “말씀의 성사적 성격은,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과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나아가 성찬의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예식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현존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주님의 말씀」), 56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