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화] 제35차 세계 젊은이의 날 교황 담화
- 작성일2020/03/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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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35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2020년 4월 5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제35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2020년 4월 5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교회는 2018년 10월에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을 주제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를 통하여 현대 세계에서 젊은이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여러분이 찾고 있는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여러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대하여 성찰을 이어 나갔습니다. 저는 2019년 1월 파나마 세계청년대회에 모인 수많은 전 세계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세계청년대회와 같은 행사들은 “함께 걸어감”이라고 하는 교회의 본질적 차원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여정에서 중요한 시점에 이를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고 우리 삶 자체도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하라는 도전 과제를 부여합니다. 이러한 도전에서 젊은이 여러분은 전문가입니다! 여러분은 여행하며 새로운 곳에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2022년에 있을 차기 국제 순례지로 선택하였습니다. 15세기와 16세기에 많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수많은 리스본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예수님 체험을 다른 민족들과 국가들과 함께 나누고자 미지의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의 주제는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루카 1,39 참조)입니다. 이에 앞서 두 해 동안,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음의 두 성경 구절에 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2020년 주제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입니다. 2021년 주제는 “일어나라. 나는 너를 네가 나를 본 것의 증인으로 선택한다.”(사도 26,16 참조)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일어나라.”라는 동사는 세 번의 세계 젊은이의 날 주제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부활하다.’와 ‘새로운 삶으로 일깨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낸 2018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에도 이 표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권고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최종 문서와 함께 여러분 삶의 길을 밝히는 등불로서 교회가 여러분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두 문서가 이행되도록 그리고 청소년 사목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사명에 길잡이가 되도록 온 교회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활기찬 노력이 리스본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과 일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이제 올해의 주제를 살펴봅시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저는 이 복음 구절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내적 활력, 꿈, 열정, 희망, 관대함을 잃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죽은 아들 앞에서 그러하셨듯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시어,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으로 이렇게 북돋워 주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0항).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한 과부의 젊은 외아들의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에 빠진 이 여인을 가엾이 여기시어 그녀의 아들을 되살리시는 기적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일련의 말씀과 몸짓에 이어 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루카 7,13-14).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몸짓에 대하여 잠시 묵상해 봅시다.
고통과 죽음 마주하기
예수님께서는 이 장례 행렬을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군중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십니다. 바라보시는 그분의 눈길이 새로운 삶의 원천인 만남을 가져옵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길은 어떠합니까? 나는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휴대 전화에 있는 수천 장의 사진이나 소셜 미디어의 프로필을 보듯이 대충 넘겨 봅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관망만 하고 맙니까! 때때로 우리는 우선 휴대 전화로 사진부터 찍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관련된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러나 때로는 우리 안에서도 죽음의 현실을 마주하곤 합니다. 이는 바로 육체적, 영적, 정서적, 사회적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이 현실을 받아들일 뿐입니까? 삶을 되찾고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또한, 저는 여러분 또래가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일부 젊은이들은 지금 이 순간만 즐기며, 더욱더 자극적인 체험에 빠져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아무 희망도 없다고 느끼기에 ‘죽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욕도 일어설 용기도 잃어버린 친구들을 봅니다.” 안타깝게도, 우울증은 젊은이 사이에서도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경우에는 자신의 목숨을 끊고자 하는 유혹으로도 이어집니다. 무관심이 지배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번뇌와 회한의 심연으로 함몰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 영혼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울고 있는 젊은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대신에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유쾌한 시간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초점 없고 무심한 눈길만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을 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내면으로는 죽었는데도 자신이 살아 있다고 믿으면서(묵시 3,1 참조) 피상적인 것들에 자기 삶을 낭비합니다. 이들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도 자신의 참다운 존엄에 맞갖게 자신을 드높이는 대신, 자신의 삶을 이미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작은 만족을 추구하며 ‘신나게 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간의 재미, 곧 지나가 버릴 다른 이의 관심과 애정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나르시시즘이 점점 더 만연해지면서 청년들과 성인들에게 똑같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마도, 돈을 벌고 자리를 잡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여기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숨 쉬듯 물질주의에 젖어 들었을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태도는 공허함과 좌절감만 키워서 결국 불행하고 의욕도 없고 권태로운 삶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부정적 상황들은 개인적 실패가 그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경 쓰고 노력하던 어떤 일이 더 이상 잘 진행되지 않거나 바라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개인적 실패감을 맛보게 됩니다. 학업이나 스포츠, 예술 등에 대한 우리의 포부가 꺾일 때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꿈’이 깨져 버리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패들은 모든 인간 삶의 일부입니다. 때로는 실패가 결국 은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기대한 것이 하나의 허상이며 우상이었음이 입증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우상은 우리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우상은 우리를 노예로 삼아 버리지만 정작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상은 희뿌연 먼지만 남긴 채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를 사로잡던 우상을 무너뜨리는 실패라면, 물론 많은 고통이 따르겠지만, 괜찮은 실패입니다.
한 젊은이가 맞닥뜨릴 수 있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죽음의 상황들은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중독, 범죄, 가난, 또는 중병을 떠올려 봅니다. 이 상황들에 대해서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맡깁니다. 또한 현재나 과거에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과 가까운 사람에게 그러한 ‘죽음’을 불러일으킨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와 동시에 저는 여러분에게 복음에 나오는 젊은이가 사실은 죽었지만, 그가 살기를 바란 그분께서 그를 보셨기 때문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도록 당부합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오늘도 그리고 날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함께 아파하기
성경에서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속속들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하여 자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삶에 진심으로 함께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삼으십니다. 그 어머니의 슬픔은 예수님 자신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 젊은 아들의 죽음이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된 것입니다.
젊은이 여러분은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역량을 거듭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여러 상황에서 필요할 때마다 기꺼이 도움을 준 모든 젊은이를 떠올려 봅니다. 재해나 지진이나 홍수가 발생했을 때에는 언제나 자진해서 도움의 손길을 제공하는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가 기꺼이 환경 보호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은 지구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의 역량을 보여 주는 증거도 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이러한 감수성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고통받는 이의 탄식에 언제나 귀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현대 세계에서 눈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에 대하여 마음이 움직이게 놔두십시오. “삶의 어떤 현실들은 눈물로 씻긴 눈에만 보입니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76항). 눈물 흘리는 사람과 함께 우는 법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또래 가운데에서도 많은 젊은이가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폭력과 박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상처가 여러분의 상처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형제자매에게 “일어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또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려고 내미시는 하느님의 손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어루만지기’
예수님께서는 장례 행렬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다가가시어 가까이 계셔 주십니다. 가까이 있음은 한층 더 나아가 다른 이에게 삶을 회복시켜 주는 용기 있는 행동이 됩니다. 예언자적 몸짓입니다. 가까이 있음은 생명을 전해 주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젊은이의 죽은 육신에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를 되살려 주십니다.
이러한 손길은 낙담하고 실의에 빠진 현실 곳곳에 스며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손길은 인간의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도 전달됩니다. 하느님의 손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자유와 존엄과 희망, 새롭고 충만한 삶에 대한 전망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의 이 몸짓은 헤아릴 수 없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어 주는 단순하지만 구체적인 표지를 통해서도 부활의 힘을 북돋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젊은이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여러분이 마주치는 고통과 죽음의 실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이를 어루만지고 여기에 생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계시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분이 먼저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을 향한 그분 호의를 체험하여 여러분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특히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병들었거나 헐벗었거나 옥에 갇힌 형제자매들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느낄 때, 여러분도 내면으로 죽은 벗들, 고통받고 있거나 믿음과 희망을 잃어버린 벗들에게 예수님처럼 가까이 다가가 어루만짐으로써 하느님 생명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되살리신 그 젊은이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써 독자가 그 젊은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끊임없이 넘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걷고 있지 않은 사람은 넘어지지도 않지만,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첫 단계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새 생명은 좋은 것이며 살아볼 만한 것입니다. 결코 우리를 저버리는 일 없이 앞날도 함께해 주실 그분께서 우리가 이 삶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참으로 새로운 창조이고 새로운 탄생입니다. 그저 마음 다스리기가 아닙니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들은, 사람들이 오늘날 유행하는 대로 다음과 같은 ‘마법’ 주문들을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듯 되풀이하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긍정 에너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그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면이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 없는 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말씀은 더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는 거룩한 창조의 말씀이며, 이 말씀만이 꺼져 버린 생명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부활한 이들’의 새 생명
되살아난 젊은이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루카 7,15) 하고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어 되살려 주신 사람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곧 자신의 성격과 바람과 필요와 꿈이 무엇인지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말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확신하던 예전이라면 그가 결코 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죽은’ 상태일 때에 우리는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관계가 단절되거나 아니면 피상적이고 거짓되며 위선적인 관계에만 머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때에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시는 것입니다’(루카 7,15 참조).
오늘날 우리에게는 ‘접속’만 있을 뿐 소통이 없습니다. 전자 기기의 사용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그 기기의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담화를 통하여 저는 “일어나라.”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출발하여, 젊은이 여러분과 함께 문화적 전환을 위한 도전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젊은이들이 가상 세계 안에 고립되어 웅크리고 있게 만드는 문화에 “일어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널리 전합시다. 이 말씀은 가상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 현실에 마음을 열라는 초대입니다. 이는 기술을 경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일어나라.”라는 말씀은 “꿈을 꾸어라.” “위험을 감수하여라.” “세상의 변화를 위하여 투신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또한 젊은이 여러분의 바람에 다시 한번 불을 댕기고 주위를 둘러싼 하늘과 별과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본모습을 찾으십시오!”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 주변에 지쳐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얼굴에 생기를 되찾아 주어, 그 얼굴이 어떠한 가상 현실보다도 더 아름다워지게 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내어 준다면 누군가는 그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본다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겠다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이것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입니다. 만약 젊은이가 어떤 일에 열정을 기울인다면, 더 나아가 어떤 한 사람에게 열정을 쏟는다면, 그는 마침내 일어나 위대한 일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자신의 온 삶을 바쳐 그분께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열정과 꿈은 무엇입니까? 열정과 꿈을 활짝 펼치십시오. 열정과 꿈을 통하여 세상과 교회와 다른 젊은이들에게 영성, 예술, 사회 분야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제안하십시오. 저의 모국어로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아간 리오(Hagan lío)! 곧, 여러분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십시오! 또 다른 젊은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일에만 관심을 두는 분이셨다면 과부의 아들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젊은이의 부활은 자기 어머니에게 아들을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머니 안에서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우리가 온 세상의 젊은이 모두를 맡겨 드린 그분을 봅니다. 성모님 안에서 우리는, 아무도 배척하지 않고 모든 젊은이를 자애로운 사랑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는 교회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 교회를 위한 전구를 청하며, 언제나 교회가 죽음의 상태에 있는 교회의 자녀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새 생명을 간구하는 어머니가 되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죽어가는 모든 자녀 안에서 교회가 함께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모든 자녀 안에서 교회도 함께 일어납니다.
젊은이 여러분의 여정을 축복합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0년 2월 11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프란치스코
* 보편 교회는 해마다 주님 성지 주일을 ‘세계 젊은이의 날’로 지낸다. 한국 교회는 해마다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청소년 주일’로 지낸다. - 편집자 주.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for the 35th World Youth Day, “Young man, I say to you, arise!” (Lk 7,14), 2020.2.11., 영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youth/documents/papa-francesco_20200211_messaggio-giovani_2020.html
이탈리아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youth/documents/papa-francesco_20200211_messaggio-giovani_2020.html
교회는 2018년 10월에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을 주제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를 통하여 현대 세계에서 젊은이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여러분이 찾고 있는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여러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대하여 성찰을 이어 나갔습니다. 저는 2019년 1월 파나마 세계청년대회에 모인 수많은 전 세계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세계청년대회와 같은 행사들은 “함께 걸어감”이라고 하는 교회의 본질적 차원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여정에서 중요한 시점에 이를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고 우리 삶 자체도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하라는 도전 과제를 부여합니다. 이러한 도전에서 젊은이 여러분은 전문가입니다! 여러분은 여행하며 새로운 곳에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2022년에 있을 차기 국제 순례지로 선택하였습니다. 15세기와 16세기에 많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수많은 리스본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예수님 체험을 다른 민족들과 국가들과 함께 나누고자 미지의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의 주제는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루카 1,39 참조)입니다. 이에 앞서 두 해 동안,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음의 두 성경 구절에 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2020년 주제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입니다. 2021년 주제는 “일어나라. 나는 너를 네가 나를 본 것의 증인으로 선택한다.”(사도 26,16 참조)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일어나라.”라는 동사는 세 번의 세계 젊은이의 날 주제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부활하다.’와 ‘새로운 삶으로 일깨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낸 2018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에도 이 표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권고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최종 문서와 함께 여러분 삶의 길을 밝히는 등불로서 교회가 여러분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두 문서가 이행되도록 그리고 청소년 사목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사명에 길잡이가 되도록 온 교회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활기찬 노력이 리스본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과 일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이제 올해의 주제를 살펴봅시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저는 이 복음 구절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내적 활력, 꿈, 열정, 희망, 관대함을 잃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죽은 아들 앞에서 그러하셨듯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시어,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으로 이렇게 북돋워 주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0항).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한 과부의 젊은 외아들의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에 빠진 이 여인을 가엾이 여기시어 그녀의 아들을 되살리시는 기적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일련의 말씀과 몸짓에 이어 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루카 7,13-14).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몸짓에 대하여 잠시 묵상해 봅시다.
고통과 죽음 마주하기
예수님께서는 이 장례 행렬을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군중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십니다. 바라보시는 그분의 눈길이 새로운 삶의 원천인 만남을 가져옵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길은 어떠합니까? 나는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휴대 전화에 있는 수천 장의 사진이나 소셜 미디어의 프로필을 보듯이 대충 넘겨 봅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관망만 하고 맙니까! 때때로 우리는 우선 휴대 전화로 사진부터 찍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관련된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러나 때로는 우리 안에서도 죽음의 현실을 마주하곤 합니다. 이는 바로 육체적, 영적, 정서적, 사회적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이 현실을 받아들일 뿐입니까? 삶을 되찾고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또한, 저는 여러분 또래가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일부 젊은이들은 지금 이 순간만 즐기며, 더욱더 자극적인 체험에 빠져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아무 희망도 없다고 느끼기에 ‘죽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욕도 일어설 용기도 잃어버린 친구들을 봅니다.” 안타깝게도, 우울증은 젊은이 사이에서도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경우에는 자신의 목숨을 끊고자 하는 유혹으로도 이어집니다. 무관심이 지배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번뇌와 회한의 심연으로 함몰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 영혼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울고 있는 젊은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대신에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유쾌한 시간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초점 없고 무심한 눈길만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을 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내면으로는 죽었는데도 자신이 살아 있다고 믿으면서(묵시 3,1 참조) 피상적인 것들에 자기 삶을 낭비합니다. 이들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도 자신의 참다운 존엄에 맞갖게 자신을 드높이는 대신, 자신의 삶을 이미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작은 만족을 추구하며 ‘신나게 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간의 재미, 곧 지나가 버릴 다른 이의 관심과 애정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나르시시즘이 점점 더 만연해지면서 청년들과 성인들에게 똑같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마도, 돈을 벌고 자리를 잡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여기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숨 쉬듯 물질주의에 젖어 들었을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태도는 공허함과 좌절감만 키워서 결국 불행하고 의욕도 없고 권태로운 삶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부정적 상황들은 개인적 실패가 그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경 쓰고 노력하던 어떤 일이 더 이상 잘 진행되지 않거나 바라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개인적 실패감을 맛보게 됩니다. 학업이나 스포츠, 예술 등에 대한 우리의 포부가 꺾일 때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꿈’이 깨져 버리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패들은 모든 인간 삶의 일부입니다. 때로는 실패가 결국 은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기대한 것이 하나의 허상이며 우상이었음이 입증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우상은 우리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우상은 우리를 노예로 삼아 버리지만 정작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상은 희뿌연 먼지만 남긴 채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를 사로잡던 우상을 무너뜨리는 실패라면, 물론 많은 고통이 따르겠지만, 괜찮은 실패입니다.
한 젊은이가 맞닥뜨릴 수 있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죽음의 상황들은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중독, 범죄, 가난, 또는 중병을 떠올려 봅니다. 이 상황들에 대해서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맡깁니다. 또한 현재나 과거에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과 가까운 사람에게 그러한 ‘죽음’을 불러일으킨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와 동시에 저는 여러분에게 복음에 나오는 젊은이가 사실은 죽었지만, 그가 살기를 바란 그분께서 그를 보셨기 때문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도록 당부합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오늘도 그리고 날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함께 아파하기
성경에서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속속들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하여 자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삶에 진심으로 함께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삼으십니다. 그 어머니의 슬픔은 예수님 자신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 젊은 아들의 죽음이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된 것입니다.
젊은이 여러분은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역량을 거듭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여러 상황에서 필요할 때마다 기꺼이 도움을 준 모든 젊은이를 떠올려 봅니다. 재해나 지진이나 홍수가 발생했을 때에는 언제나 자진해서 도움의 손길을 제공하는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가 기꺼이 환경 보호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은 지구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의 역량을 보여 주는 증거도 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이러한 감수성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고통받는 이의 탄식에 언제나 귀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현대 세계에서 눈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에 대하여 마음이 움직이게 놔두십시오. “삶의 어떤 현실들은 눈물로 씻긴 눈에만 보입니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76항). 눈물 흘리는 사람과 함께 우는 법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또래 가운데에서도 많은 젊은이가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폭력과 박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상처가 여러분의 상처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형제자매에게 “일어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또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려고 내미시는 하느님의 손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어루만지기’
예수님께서는 장례 행렬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다가가시어 가까이 계셔 주십니다. 가까이 있음은 한층 더 나아가 다른 이에게 삶을 회복시켜 주는 용기 있는 행동이 됩니다. 예언자적 몸짓입니다. 가까이 있음은 생명을 전해 주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젊은이의 죽은 육신에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를 되살려 주십니다.
이러한 손길은 낙담하고 실의에 빠진 현실 곳곳에 스며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손길은 인간의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도 전달됩니다. 하느님의 손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자유와 존엄과 희망, 새롭고 충만한 삶에 대한 전망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의 이 몸짓은 헤아릴 수 없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어 주는 단순하지만 구체적인 표지를 통해서도 부활의 힘을 북돋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젊은이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여러분이 마주치는 고통과 죽음의 실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이를 어루만지고 여기에 생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계시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분이 먼저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을 향한 그분 호의를 체험하여 여러분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특히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병들었거나 헐벗었거나 옥에 갇힌 형제자매들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느낄 때, 여러분도 내면으로 죽은 벗들, 고통받고 있거나 믿음과 희망을 잃어버린 벗들에게 예수님처럼 가까이 다가가 어루만짐으로써 하느님 생명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되살리신 그 젊은이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써 독자가 그 젊은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끊임없이 넘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걷고 있지 않은 사람은 넘어지지도 않지만,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첫 단계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새 생명은 좋은 것이며 살아볼 만한 것입니다. 결코 우리를 저버리는 일 없이 앞날도 함께해 주실 그분께서 우리가 이 삶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참으로 새로운 창조이고 새로운 탄생입니다. 그저 마음 다스리기가 아닙니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들은, 사람들이 오늘날 유행하는 대로 다음과 같은 ‘마법’ 주문들을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듯 되풀이하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긍정 에너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그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면이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 없는 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말씀은 더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는 거룩한 창조의 말씀이며, 이 말씀만이 꺼져 버린 생명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부활한 이들’의 새 생명
되살아난 젊은이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루카 7,15) 하고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어 되살려 주신 사람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곧 자신의 성격과 바람과 필요와 꿈이 무엇인지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말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확신하던 예전이라면 그가 결코 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죽은’ 상태일 때에 우리는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관계가 단절되거나 아니면 피상적이고 거짓되며 위선적인 관계에만 머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때에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시는 것입니다’(루카 7,15 참조).
오늘날 우리에게는 ‘접속’만 있을 뿐 소통이 없습니다. 전자 기기의 사용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그 기기의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담화를 통하여 저는 “일어나라.”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출발하여, 젊은이 여러분과 함께 문화적 전환을 위한 도전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젊은이들이 가상 세계 안에 고립되어 웅크리고 있게 만드는 문화에 “일어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널리 전합시다. 이 말씀은 가상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 현실에 마음을 열라는 초대입니다. 이는 기술을 경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일어나라.”라는 말씀은 “꿈을 꾸어라.” “위험을 감수하여라.” “세상의 변화를 위하여 투신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또한 젊은이 여러분의 바람에 다시 한번 불을 댕기고 주위를 둘러싼 하늘과 별과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본모습을 찾으십시오!”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 주변에 지쳐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얼굴에 생기를 되찾아 주어, 그 얼굴이 어떠한 가상 현실보다도 더 아름다워지게 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내어 준다면 누군가는 그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본다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겠다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이것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입니다. 만약 젊은이가 어떤 일에 열정을 기울인다면, 더 나아가 어떤 한 사람에게 열정을 쏟는다면, 그는 마침내 일어나 위대한 일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자신의 온 삶을 바쳐 그분께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열정과 꿈은 무엇입니까? 열정과 꿈을 활짝 펼치십시오. 열정과 꿈을 통하여 세상과 교회와 다른 젊은이들에게 영성, 예술, 사회 분야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제안하십시오. 저의 모국어로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아간 리오(Hagan lío)! 곧, 여러분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십시오! 또 다른 젊은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일에만 관심을 두는 분이셨다면 과부의 아들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젊은이의 부활은 자기 어머니에게 아들을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머니 안에서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우리가 온 세상의 젊은이 모두를 맡겨 드린 그분을 봅니다. 성모님 안에서 우리는, 아무도 배척하지 않고 모든 젊은이를 자애로운 사랑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는 교회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 교회를 위한 전구를 청하며, 언제나 교회가 죽음의 상태에 있는 교회의 자녀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새 생명을 간구하는 어머니가 되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죽어가는 모든 자녀 안에서 교회가 함께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모든 자녀 안에서 교회도 함께 일어납니다.
젊은이 여러분의 여정을 축복합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0년 2월 11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프란치스코
* 보편 교회는 해마다 주님 성지 주일을 ‘세계 젊은이의 날’로 지낸다. 한국 교회는 해마다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청소년 주일’로 지낸다. - 편집자 주.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for the 35th World Youth Day, “Young man, I say to you, arise!” (Lk 7,14), 2020.2.11., 영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youth/documents/papa-francesco_20200211_messaggio-giovani_2020.html
이탈리아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youth/documents/papa-francesco_20200211_messaggio-giovani_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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