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의 달 CBCK복음화위원장 담화
- 작성일2015/09/2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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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교형 자매 여러분!
1. 10월 전교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는 신앙으로서 받은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되새기며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부터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를 ‘자비의 특별 희년’으로 선포하고, 그에 따른 칙서 ‘자비의 얼굴’을 반포하셨습니다. 이 칙서에서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안온한 도성처럼 감싸주던 성벽은 무너져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복음화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임무는 열정과 확신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4항).
따라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 한 해를 특별 희년으로 지내면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교황님의 당부대로, 열정과 확신으로 신앙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받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다른 이들을 같은 너그러움과 자비의 눈길로 바라보고 대함으로써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자비의 얼굴’의 순서와 구조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순서와 정신을 깨닫기 위해서 제일 의미 있는 성서 대목 중의 하나는 마태오 복음 18장입니다. 이 대목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며 나는 그 용서와 자비를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받았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인류 역사상 가장 패악한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혼자 다 지었다고 해도, 하느님을 만나면 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분께 달려가 그 품에 안길 것입니다. 제가 지었다는 죄를 다 합해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용광로에 비하면, 그것은 작은 빗방울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자신이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의 주인공처럼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의 종들 가운데 하나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갚을 길이 없자 왕 앞에 엎드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며 애걸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왕은 그를 ‘가엽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자비의 얼굴’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내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칩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했지만,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둡니다. 다른 동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치자, 왕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말합니다.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왕은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깁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3.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우리는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로마 8,12).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분께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1고린 4,7).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하는 말도, 그리스어 원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탕감해 주오니,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소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런 맥락에서 보면, 대단히 강한 의미를 띠고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칙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묵상하고(1-9항),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이제 세상에 나가 그 자비를 증언하고 전달할 사명을 일깨우며(10-20항), 정의와 자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20-21항).
정의와 자비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자비에 관해서 하는 모든 말이 의미를 잃게 됩니다. 정의와 자비뿐 아니라, 성서에서 하느님을 그려 내기 위해서 동원되는 모든 말이나 인간 관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빌려 쓰는 표현들은 같은 사실의 ‘변조’(變調)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1요한 4,8.16)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이 하나이고 똑같은 사랑이 상대방에 따라, 그리고 그가 그때그때 맞닥뜨리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햇빛이 우리 눈에는 하얗게 느껴지지만, 분광기를 통과하면 광파의 장단에 따라 일곱 가지 대표 색이 나타나고 그들 사이에도 무수한 색의 변조가 보입니다. 또 소리도 음파의 장단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음조로 우리 귀에 들립니다.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본질도 이와 같이 상대방과 그가 처한 구체적 상황에 따라 무수한 모습으로 변조됩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이 왕, 전사, 심판자, 주인, 아버지, 구원자, 스승, 목자, 지도자, 친구, 애인, 남편 등으로 나타나시고, 거기에 맞추어 권능, 용맹, 정의, 정확한 품삯, 자비, 우정, 사랑, 빛, 길, 진리, 생명, 충실성 등, 변조된 모습에 어울리는 개념이 그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사용됩니다.
4. 그런데 우리가 과거와 오늘날 계속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층 더 깊은 힘인 사랑이 정의를 포함한 인간 삶의 다양한 측면들에 깊이 스며들지 않은 채, 정의만을 내세우면 자칫 정의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세계의 경험에 비추어 “‘극단의 정의는 극단의 불의다’라는 금언이 생긴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자비로우신 하느님, 12항). 우리나라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정의를 수호하고 실현해야 하는 법원에 가면, 정의의 상징으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정확하게 균형을 잡은 저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새겨진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극도의 정의를 앞세워 극도의 불의가 자행되고 있는 현실은 그 저울이 자주 균형을 잃고 불의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는 현상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현실에서는 그 저울이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일도 있어야 세상이 희망을 찾고 정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비는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의 정의를 이깁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정의는 그분의 자비입니다. 우리는 죄의 구렁텅이에 갇혀 있는 인간을 보시고 단장의 슬픔을 느끼시어, 거기에서 끌어내시려고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신”(요한 16,8) 성령의 도움으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자비의 얼굴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무서운 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용서와 자비로 나타나는 당신의 전능으로 사람들을 당신께 끌어올려 주시며(요한 12,32 참조),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되었음을(로마 8,24 참조) 믿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요체입니다.
우리가 이를 깊이 깨닫고 그만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면, 똑같은 용서와 자비를 목말라하는 다른 이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잘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과 그들 간에 세워져 있던 “담벼락이 무너지며”(에페 2,14-16), “그들을 향해 던지려고 쥐고 있던 돌멩이가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요한 8,2-11)을 느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 희년의 대사(大赦)와 함께 모든 사람, 특히 그 동안 자비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이들과 온 인류에게까지 퍼져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해를 계기로 앞으로 더욱 깊고 넓게 확산되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구하는 기도(22-25항)로 이 교서를 마칩니다.
5. 우리는 교구마다 지정된 성당의 ‘성문’을 열고 통과함으로써 시작되는 자비의 특별 희년 동안, ‘자비의 얼굴’을 깊이 묵상하고, 성문이 있는 각 교구와 전국의 성지를 순례하며, 2016년 사순 제4주일을 앞둔 3월 11일부터 12일까지 ‘주님을 위한 24시간’을 거룩하게 지키며 고해성사를 보고, 이 성년의 사순시기에 교황님의 특사로 파견될 자비의 선교사의 강론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 ‘마음의 문’(자비의 얼굴, 25항; 마태 13,15; 사도 28,27; 1요한 3,17)을 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루가 9,23-25와 병행구)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가 6,35)로 변모하며, 교회는 “자비의 참된 증인”(자비의 얼굴, 25항)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새로운 복음화의 길에 들어선 오늘날, 새로운 열정, 그리고 새로운 사목 방법으로 이 자비를 제시할”(자비의 얼굴, 12항)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루살렘이 장차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 문을 활짝 열어 평화와 정의로 세워질 ‘새로운 예루살렘’이 될 날을 내다보던 예언자들의 꿈(이사 26,1-5; 60,11; 에제 48,30-32; 미가 2,8-9 참조)이 한 발짝 성큼 더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 10월 전교의 달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 여기에 사용된 성경 구절은 이병호 주교의 뜻에 따라 공동번역을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