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차 홍보주일 교황 담화
- 작성일2016/04/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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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0차 홍보 주일 담화
(2016년 5월 8일)
커뮤니케이션과 자비의 풍요로운 만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비의 성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는 커뮤니케이션과 자비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강생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교회의 모든 존재와 활동의 특성인 자비를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의 내용과 방법, 우리의 모든 언어와 동작은 모든 이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온유와 용서를 표현하여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인 사랑은 우리가 자신을 열어 나누도록 이끌어줍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으로 활기를 얻게 되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하느님의 힘을 전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이와 소통하도록 요청받습니다. 특히 교회의 언어와 활동은 본래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충만한 삶을 향한 여정에 힘을 보태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는 이 충만한 삶을 모든 이에게 전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도 기꺼이 어머니인 교회의 따스함을 받아들여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누어 그들이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따스함이 바로 신앙의 언어에 진정성을 담아 주어,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할 때 그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는 불꽃을 일으키게 됩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서로를 연결해 주고 만남과 유대를 촉진하여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려 깊은 언어와 행동으로 오해를 피하고 아픈 기억을 치유하며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언어는 개인들, 가족들, 사회 집단들, 민족들을 저마다 연결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에서 모두 가능합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동은 우리 모두가 비난과 복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악순환은 개인과 민족들을 끊임없이 속박하고 증오에 찬 언어의 표현을 조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는 늘 친교를 촉진하여야 하고, 심지어 악을 단호히 단죄해야 하는 경우에도 결코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키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이 상처 입은 관계를 치유하고 가정과 공동체의 평화와 조화를 회복시켜 주는 자비의 힘을 재발견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랜 상처와 남은 원한이 인간을 사로잡아 소통과 화해를 얼마나 방해하는지를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는 민족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자비는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고 대화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였습니다. “자비는 본질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땅을 적시는 부드러운 단비처럼 하늘에서 내립니다. 자비는 서로에게 은총이 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과 자비를 입은 사람 모두에게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베니스의 상인」, 4막 1장).
결코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자비에서 정치와 외교의 언어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저는 제도적 정치적 책임을 지는 이들과 여론을 이끄는 이들이, 자기와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들, 또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 특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한 이들의 처지를 악용하여 불신과 두려움과 증오를 부채질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화해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러한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담대함이 오래된 갈등의 실질적 해결과 지속적인 평화를 실현할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7.9).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교회 목자로서의 봉사가 우리의 반대자들을 이겼다는 교만한 자부심을 표출하거나, 세상의 정서로는 패배자로 여겨져 버림받은 이들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비는 삶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 세상의 냉대만을 받은 이들에게 따스함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의인과 죄인을 철저히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폭력과 부패와 착취와 같은 죄의 상황을 단죄할 수 있고 또한 단죄하여야 하지만, 사람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잘못을 저지른 이들의 특정한 행동 방식이 지닌 부정과 불의를 꾸짖어 그들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을 해방시켜 주고 넘어진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진리는 궁극적으로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의 온유한 자비는 우리가 진리를 선포하고 불의를 단죄하는 방법의 척도가 됩니다.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사랑으로 진리를 확언하는 것입니다(에페 4,15 참조). 사랑에서 나와 온유와 자비를 담은 언어만이 죄인인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엄격하거나 도덕주의적인 언어와 행동은 우리가 회개와 자유로 이끌고자 하는 이들을 더욱 소외시킬 위험이 있으며, 그들의 거부감과 방어적 태도를 강화시킵니다.
어떤 이들은 자비를 바탕으로 삼는 사회관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거나 관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정에서 처음 경험해 본 인간관계를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의 능력과 성과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기 자녀가 최고이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표 달성을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은 늘 우리를 환대해 주는 곳입니다(루카 15,11-32 참조). 저는 인간 사회가 모르는 사람들끼리 경쟁하여 일등을 뽑는 경기장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언제나 문이 열려 있어 누구나 환대를 느끼는 집과 가정임을 모든 이가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경청하여야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나눔을 의미합니다. 나눔에는 경청과 수용이 필요합니다. 경청은 단순한 청취 이상의 것입니다. 청취는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지만 경청은 커뮤니케이션으로 친밀함을 요구합니다. 경청을 통해서 우리는 수동적인 관망자나 사용자나 소비자의 상황에서 벗어나 올바른 자세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경청은 또한 다른 이와 함께 의문과 의혹을 제기하고, 나란히 함께 길을 가며, 절대 권력의 독선에서 벗어나고, 공동선을 위하여 우리의 능력과 은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청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못 들은 척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경청은 다른 이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를 이해하고 높이 평가하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순교 또는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이는 우리가 불타는 떨기 앞에 선 모세와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는 “거룩한 땅” 위에 설 때 우리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탈출 3,5 참조). 경청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커다란 은총입니다. 이는 우리가 청하여 실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은사인 것입니다.
전자 우편, 문자 메시지, 소셜 네트워크, 인터넷 채팅 또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온전한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커뮤니케이션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수단을 잘 활용하는 능력과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인간관계를 용이하게 하고 사회의 선을 증진시킬 수 있지만, 개인들과 집단들의 양극화와 분열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디지털 세계는 열린 광장으로 사람들이 만나 서로에게 힘을 주거나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유익한 토론을 하거나 중상모략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저는 자비 안에서 지내는 이 희년에 “우리가 더 활발한 대화를 나누어 서로를 더욱 잘 알고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희년에 모두 닫힌 마음과 서로 무시하는 마음을 없애고 모든 폭력과 차별을 몰아내기를 바랍니다”(칙서 「자비의 얼굴」, 23항). 또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하여 참된 시민 의식을 키울 수 있습니다. 디지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에는,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존엄을 지닌 이웃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인터넷은 건전하고 나눔에 열려 있는 사회의 건설에 현명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많은 사람들의 지평을 넓혀 주는 자리와 수단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인 것으로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저는 커뮤니케이션의 이러한 힘을 친밀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커뮤니케이션과 자비의 만남은 배려하고 위로하며 치유하고 함께 기뻐하는 친밀함을 이끌어 낼 때에 올바른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붕괴와 분열과 양극화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자비와 함께하는 커뮤니케이션은 하느님의 자녀들과 우리의 모든 인류 형제자매들의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연대를 이루는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여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티칸에서
2016년 1월 24일
프란치스코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for the 50th World Communications Day, 2016.1.24., Communication and Mercy: A Fruitful Encounter,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판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