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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학순 주교의 삶이 가진 의의
  • 작성일2021/09/03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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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학순 주교의 삶은 굴곡진 한국현대사와 묘하게 맞물린다. 지학순 주교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태어나서, 분단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 때 로마 유학을 다녀오는 등 신부로서 사목생활을 하던 중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이 수립된 후인 1965년, 지학순은 원주교구 주교로 착좌(着座)했다. 지학순 주교가 원주교구 주교로 활동한 기간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가 불법적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학순 주교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으로 군부독재가 마무리되었던 1993년에 세상을 떠났다. 지학순 주교의 삶이 한국현대사의 궤적과 그저 단순하게 맞아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평안남도 출신인 지학순 주교는 해방 이후 분단으로 인해 한반도 이북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신학생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고, 그 탄압을 피해 월남(越南)하면서 이산가족이 되었다. 그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지학순 주교는 국군에 자원입대했고,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전역한 뒤 신부 서품을 받고 다시 군종 신부로 활동했다. 특히, 군사독재 기간 내내 지학순 주교는 고통받는 학생, 노동자, 농민과 함께, 군부독재와 거기에 기생하는 재벌에게 저항했고, 탄압받는 사람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생명사상에 기초한 생활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해서, “한살림”이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통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지학순 주교의 삶은 어떠한 의의를 가지고 있을까? 첫째, 지학순 주교는 생애 내내 약자의 편에 섰다.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 때 누명을 쓰고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던 학생들의 편에 서서 독재에 저항했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학생들이 원주교구로 피신했을 때 원주교구의 보호를 묵인했다. 또한, 소위 “삥땅사건”, 원풍모방 노동조합 재건, 사북사건 등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고 정부와의 중재에 힘썼다. 그리고 남한강 유역 수해복구 사업 역시 자연재해로 고통받던 지역 주민들을 구호하기 위함이었다. 즉, 지학순 주교의 활동은 단순히 정치적 투쟁이 아닌, 약자를 위한 보호의 차원이라는 의미다. 둘째, 지역을 이해하고 지역적 특성을 십분 고려했다. 지학순 주교가 활동했던 원주를 비롯한 영서 지역은 도시, 광산촌, 농촌이 혼합되어 있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곳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일찍부터 지역 언론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원주문화방송 설립에 참여했다. 원주문화방송이 5.16장학회의 횡령으로 재정적 위기를 겪을 때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개최하여 정권에 저항했던 것도 지학순 주교가 지역에서 바른 언론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강 유역 수해복구사업과 광산지역의 협동조합, 한우보급사업 등도 지역의 실정에 맞는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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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은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원주교구, 상지대학교를 비롯한 원주 지역의 다양한 단체가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며, 많은 사람들이 지학순 주교의 삶이 가지고 있는 의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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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투데이신문(http://www.n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