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인터뷰] 박상용 신부 "지학순 주교는 ‘빛과 소금’되는 교회상 보여주고 행동한 목자"
- 작성일2021/09/13 01:44
- 조회 886
9월 한 달 간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행사 열어
유신독재를 비판한 양심선언으로 한국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구심점이 됐던 분이죠. 원주교구 초대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9월 한 달간 열리고 있습니다.
28개 원주지역 단체들이 함께하는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시민사회추진위원회가 마련했는데요,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고 계신 사단법인 지학순 다니엘 대표이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장, 박상용 신부 연결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박상용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지학순 주교님은 교회를 넘어 한국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셨는데요, 어느덧 선종 28주기이자 탄생 100주년이 됐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주교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
▶조금 개인적인 대답일 수 있는데요. 처음 주교님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은 고3때였습니다.
이미 그 전부터 성소에 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수감생활을 하시다가 다른 수인을 대신해서 죽음을 먼저 맞이하신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어릴 때부터 결심한 성소의 꿈을 확고히 하던 시기였는데요.
저희 형님으로부터 강원도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님에 대한 아주 짤막한 소개를 듣고 감명을 받아서 사제 숫자가 적은 원주교구에서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같이 모색해 보자고 했죠. 원래는 타 교구에 속해 있던 제가 교구 간의 두꺼운 장벽을 잘 몰랐던 순진한 결정이긴 했는데 결과적으로 원주교구 사제가 되었고요. 지금은 지 주교님 기념사업위원장을 맡고 있으니까 뜻깊은 인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지 주교님께서 당뇨 합병증에 심하게 시달리던 모습이 그분에 대한 저의 주된 기억입니다 지 주교님의 많은 업적은 회자되는 소식과 함께 나중에 기록과 연구들을 통해서 더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지 주교님 시기에 그 놀라운 주교님의 예지력, 선구자다운 모습은 알면 알수록 저를 설레게 했죠.
▷유신독재 시절 주교님의 양심선언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셨지만 끝까지 정의를 지키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셨는데요, 교회 안에서도 하신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기념비적으로 남은 주교님의 공적은 뭐라고 보세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요.
첫째는 1965년에 창설된 원주교구에 첫 교구장으로 오셨는데, 당시 강원도 중남부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 또한 교회에 대해서 굉장히 의존적이고 단순히 원조를 받는 곳이라데 익숙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모습이었어요. 지 주교님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잘 구현하신 분이기도 한데요. 하느님 백성으로서 평신도들의 자의식을 일깨우는데 주력하시면서 다양한 교육을 통해 여러 단체들을 결성하셨고, 지역 구석구석 광산촌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맞는 신자 의식을 살아있게끔 일깨우셨어요. 다시 말해서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교우들을 새로운 가치교육을 통해서 능동적인 신앙생활로 탈바꿈시킨 획기적이고 다양한 시도들을 그 당시에 많이 하셨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교회가 주로 교회 내에서만 치중하던 모습에서 세상과 함께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당신 스스로도 몸소 보이시고 또한 눈 뜨게 해 주셨다는 겁니다. 세상 여러 모순, 불합리한 부분, 인간의 기본권마저 너무 쉽게 무시되는 사회에 교회가 아픔을 함께하고 보듬고 희망과 용기를 줬던 그런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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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톨릭평화방송
유신독재를 비판한 양심선언으로 한국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구심점이 됐던 분이죠. 원주교구 초대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9월 한 달간 열리고 있습니다.
28개 원주지역 단체들이 함께하는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시민사회추진위원회가 마련했는데요,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고 계신 사단법인 지학순 다니엘 대표이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장, 박상용 신부 연결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박상용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지학순 주교님은 교회를 넘어 한국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셨는데요, 어느덧 선종 28주기이자 탄생 100주년이 됐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주교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
▶조금 개인적인 대답일 수 있는데요. 처음 주교님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은 고3때였습니다.
이미 그 전부터 성소에 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수감생활을 하시다가 다른 수인을 대신해서 죽음을 먼저 맞이하신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어릴 때부터 결심한 성소의 꿈을 확고히 하던 시기였는데요.
저희 형님으로부터 강원도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님에 대한 아주 짤막한 소개를 듣고 감명을 받아서 사제 숫자가 적은 원주교구에서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같이 모색해 보자고 했죠. 원래는 타 교구에 속해 있던 제가 교구 간의 두꺼운 장벽을 잘 몰랐던 순진한 결정이긴 했는데 결과적으로 원주교구 사제가 되었고요. 지금은 지 주교님 기념사업위원장을 맡고 있으니까 뜻깊은 인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지 주교님께서 당뇨 합병증에 심하게 시달리던 모습이 그분에 대한 저의 주된 기억입니다 지 주교님의 많은 업적은 회자되는 소식과 함께 나중에 기록과 연구들을 통해서 더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지 주교님 시기에 그 놀라운 주교님의 예지력, 선구자다운 모습은 알면 알수록 저를 설레게 했죠.
▷유신독재 시절 주교님의 양심선언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셨지만 끝까지 정의를 지키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셨는데요, 교회 안에서도 하신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기념비적으로 남은 주교님의 공적은 뭐라고 보세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요.
첫째는 1965년에 창설된 원주교구에 첫 교구장으로 오셨는데, 당시 강원도 중남부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 또한 교회에 대해서 굉장히 의존적이고 단순히 원조를 받는 곳이라데 익숙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모습이었어요. 지 주교님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잘 구현하신 분이기도 한데요. 하느님 백성으로서 평신도들의 자의식을 일깨우는데 주력하시면서 다양한 교육을 통해 여러 단체들을 결성하셨고, 지역 구석구석 광산촌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맞는 신자 의식을 살아있게끔 일깨우셨어요. 다시 말해서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교우들을 새로운 가치교육을 통해서 능동적인 신앙생활로 탈바꿈시킨 획기적이고 다양한 시도들을 그 당시에 많이 하셨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교회가 주로 교회 내에서만 치중하던 모습에서 세상과 함께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당신 스스로도 몸소 보이시고 또한 눈 뜨게 해 주셨다는 겁니다. 세상 여러 모순, 불합리한 부분, 인간의 기본권마저 너무 쉽게 무시되는 사회에 교회가 아픔을 함께하고 보듬고 희망과 용기를 줬던 그런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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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톨릭평화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