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기원 ‘희망의 순례’ 시작
- 작성일2022/06/2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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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2-06-26] |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최양업 신부 시복 추진 새 동력 되길”
배론성지서 선포 미사 봉헌
출생·선종지와 묘소 비롯한
전국 30곳 순례 안내서 발간
시복 위한 관심과 기도 고취
순례자 명부 시복 자료로 활용
원주교구가 가경자 최양업 신부(토마스, 1821~1861) 선종 161주기를 맞아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희망의 순례’ 시작을 선포했다.
‘희망의 순례’를 주관하는 원주교구 배론성지(주임 곽호인 베드로 신부)는 6월 15일 오전 11시 성지 내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성당에서 곽호인 신부(교구 총대리) 주례, 배은하 신부(타대오·원주교구 제천 서부동본당 주임) 등의 공동집전으로 ‘희망의 순례’ 선포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에는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장승기(베드로) 회장과 배론성지 순례객 등이 참례했다.
‘희망의 순례’는 최양업 신부 출생지(다락골성지), 선종지(진안리성지), 묘소(배론성지)와 사목 발자취가 남아 있는 교우촌, 성당 등 모두 30곳을 순례하는 여정이다. 원주교구가 시작한 ‘희망의 순례’는 지난해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에 기대했던 시복이 교황청 시성부 기적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미뤄지자 새로운 기폭제가 필요하다는 교구장 조규만 주교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곽 신부는 조 주교의 제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기쁜소식’ 출판사 전갑수(베르나르도) 대표에게 최양업 신부 관련 성지와 교우촌 등을 안내하는 책자 제작을 의뢰했다. 마침 1988년부터 2005년까지 17년간 배론성지 주임으로 봉직했던 배은하 신부도 올해 사순 시기 동안 최양업 신부 발자취를 따라 전국을 순례하면서 순례 안내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전 대표에게 “전국 신자들에게 최양업 신부님 순례 안내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전 대표는 한국교회에 성지순례 붐을 일으켰던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를 기획한 바 있다.
곽 신부와 배 신부, 전 대표가 의기투합하자 ‘희망의 순례’ 안내서 「희망의 순례자」(기쁜소식/88쪽/1만 원)가 ‘희망의 순례’ 선포일에 맞춰 발간됐다.
배 신부는 최양업 신부 선종 161주기 미사를 겸한 ‘희망의 순례’ 선포 미사 강론에서 “순례지 30곳을 단지 방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걷고 묵상하는 가운데 최양업 신부님이 남기신 신앙 열정을 배웠으면 한다”며 “많은 신자들이 ‘희망의 순례’에 참여할수록 최양업 신부님 시복 심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희망의 순례’는 순례지 30곳 중 어디에서든 출발할 수 있지만 최양업 신부 묘소가 있는 배론성지에서 마쳐야 한다. 30곳 순례를 마친 신자에게는 원주교구장 명의 축복장과 기념품을 수여하며, 배론성지에서 ‘희망의 순례자 명부’에 등재한다. 이 명부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최양업 신부 시복 자료로 제출할 예정이다.
배론성지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전 11시 ‘희망의 순례’ 참여 신자(‘희망의 순례자’)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최양업 신부 탄생 202주년이 되는 내년 3월 1일 첫 번째 축복장 수여식을 연다. 곽 신부는 “‘희망의 순례’ 진행 경과를 보면서 순례 참여자를 위한 특별 미사, 피정, 학술발표회 등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기사원본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70406&acid=137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기원 희망의 순례
‘땀의 순교자’ 숨결 남아있는 성지·교우촌·성당 30곳 걷는 여정
어디서든 출발 가능… 종착지는 최양업 신부 묘소 있는 배론성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 1861)의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희망의 순례’가 원주교구 배론성지(주임 곽호인 베드로 신부) 주관으로 최양업 신부 선종 161주기인 6월 15일 시작됐다.
희망의 순례는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성지, 교우촌, 성당 등 모두 30곳을 순례하며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정이다.
각 순례지에 남겨진 최양업 신부의 신앙 유산을 쉽고도 충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쁜소식’ 출판사(대표 전갑수 베르나르도)는 순례 안내서 「희망의 순례자」를 제작했다. 신자들이 희망의 순례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순례지를 교구별로 구분해 소개한다. 순례 시작은 어디서든 할 수 있지만, 최양업 신부 묘소가 있는 배론성지에서 마쳐야 한다.
■ 서울대교구(5곳)
서울대교구에는 ▲종로성당 ▲주교좌명동대성당 ▲당고개순교성지 ▲103위 시성 터 ▲124위 시복 터의 5곳 순례지가 포함돼 있다.
종로성당은 최양업 신부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복자와 관련된 순례지다.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자식들과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최경환 성인은 계속되는 문초와 고문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두 달여 만에 순교했다. 종로성당은 한양의 좌우 포도청과 의금부, 형조 등을 아우르는 순례지 성당이다.
명동대성당 지하묘역에는 최경환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당고개순교성지는 이성례 복자가 기해박해 때 순교한 곳이다. 최경환 성인은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시성됐고, 이성례 복자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복됐다.
■ 인천·수원·의정부교구(5곳)
인천·수원·의정부교구에는 ▲인천교구 접푸리 교우촌 ▲수원교구 안양 수리산성지 ▲수원교구 용인 손골성지 ▲수원교구 용인 한덕골 교우촌 ▲황해도 교우촌(의정부교구 참회와속죄의성당)의 5곳 순례지가 포함돼 있다.
접푸리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한국인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다. 1836년 2월, 접푸리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 신부는 점점 어려워지는 집안 살림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았고 같은 해 12월 유학을 떠나게 된다. 접푸리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녹청자박물관 일대인 것으로 여겨진다.
수리산성지는 최양업 신부가 유학을 떠난 후 부친 최경환 성인이 가족들을 이끌고 이주해 교우촌 공소 회장까지 지낸 곳이다. 1849년 조선으로 돌아온 최양업 신부는 수리산을 방문할 때마다 부친 묘소에서 남은 가족들과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손골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뒤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 입국 후 손골에 묵고 있던 페롱 신부를 만나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펼치는 데 따르는 어려움과 외로움에 대해 서로 공감했다.(1857년 9월 14일자 서한) 한덕골 교우촌 역시 최양업 신부가 1849년 귀국한 뒤 며칠간 머무르며 형제들을 만나 위로했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가 1856년 가을 서울에서 유배된 여인과 신자 가족이 머물던 황해도의 작은 교우촌을 방문해 어른 30여 명에게 세례를 준 일이 있다. 황해도 교우촌은 2018년 6월 ‘북한 지역 순교자들을 위한 순례지’로 선포된 참회와속죄의성당 순례로 갈음한다.
■ 춘천·원주교구(4곳)
춘천·원주교구에는 ▲춘천교구 철원 김성 교우촌(김화성당) ▲춘천교구 화천 만산 교우촌 ▲원주교구 서지 교우촌 ▲원주교구 제천 배론성지 4곳이 자리한다.
김성 교우촌은 서울에서 살던 최양업 신부와 가족들이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지자 이주한 곳이다. 최양업 신부와 가족들은 1828년에서 1835년까지 김성 교우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 김성 교우촌은 현재 북한 지역이므로 김화성당을 순례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만산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사흘 길을 걸어 가난한 다섯 가정에게 성사를 집전했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의 1857년 9월 14일자 서한에는 만산 교우촌이 ‘조선의 알프스산맥’이라고 말해야 할 만큼 아주 높은 산지라고 표현돼 있다. 만산 교우촌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으며 인근 조각공원 일대로 여겨진다. 서지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의 먼 친척인 최해성 요한 복자가 살던 곳이다. 1856년 9월 13일자 서한에 최해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배론성지는 최양업 신부의 묘소와 황사영(알렉시오)가 백서를 쓴 토굴 등이 있는 곳으로서 희망의 순례는 이곳에서 완성된다.
■ 대전교구(7곳)
최양업 신부 출생지가 포함된 대전교구에는 가장 많은 ▲청양 다락골성지 ▲부여 도앙골성지 ▲아산 남방제성지 ▲천안 성거산성지 ▲금산 진밭들 교우촌 ▲서천 불무골 교우촌 ▲서천 산막골 교우촌의 7곳 순례지가 분포한다.
최양업 신부는 할아버지(최인주) 대부터 정착해 살던 다락골의 새터 교우촌에서 1821년 3월 1일 태어났다. 도앙골은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자마자 열 달 동안 사목순방을 마치고 1850년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조선에서 첫 편지를 썼던 유서 깊은 곳이다.
남방제성지는 최양업 신부의 복사 겸 마부였던 조화서(베드로) 성인과 여러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던 곳으로, 조화서 성인은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의 임종을 지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성거산성지는 최양업 신부 큰아버지 최영열과 동생 최선정(안드레아)이 잠시 살았던 곳이면서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위해 자주 들렀던 교우촌이다. 진밭들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 서한(1856년 9월 13일자)에 등장하는 곳으로 이곳에 사목차 방문해 성사 집전 중 포졸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일대가 밭인 까닭에 진산성지 순례로 대신한다.
불무골은 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14일자와 9월 15일자 서한을 쓴 교우촌이다. 두 서한에서 당시 박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산막골은 최양업 신부와 각별한 사이였던 페롱 신부가 1858년부터 거주하며 사목했던 장소로 최양업 신부도 이곳에 자주 방문했다.
■ 청주교구(3곳)
청주교구 순례지는 ▲보은 멍에목성지 ▲진천 배티성지 ▲음성 봉암성지 3곳이다.
멍에목성지는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에서 교우촌 신자들의 깊은 신앙심과 신자공동체의 모습이 소상히 기록된 곳이다. 배티성지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던 성지로서 이곳에서 신학교를 맡아 신학생 3명을 선발해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봉암성지 방축골과 계마대에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교우촌이 형성됐으며, 최양업 신부는 방축골과 계마대를 방문해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고 김백심의 아들 요한 사도를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 대구·부산·안동교구(4곳)
대구·부산·안동교구에는 ▲대구대교구 칠곡 신나무골성지 ▲대구대교구 경주 진목정성지 ▲부산교구 울주 죽림굴 ▲안동교구 문경 진안리성지 4곳의 순례지가 있다.
영남지방 신앙의 요람인 신나무골은 샤스탕 신부, 다블뤼 주교, 리델 주교가 사목활동을 했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 역시 12년간 사제 활동 기간 중 신나무골을 자주 방문해 성사를 집전했다. 진목정에는 신유박해(1801년) 이후 신자들이 피난을 와서 살게 됐을 것으로 추측되며 최양업 신부도 이곳에서 사목했다. 현재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허인백(야고보) 세 복자의 가묘가 있다.
죽림굴은 최양업 신부가 1860년 경신박해를 피해 3개월 정도 은신했던 곳이다. 1860년 9월 3일자 서한에 “하직인사가 될 듯하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당시 급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사목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드러냈다. 진안리성지는 최양업 신부가 1860년 박해 뒤 서울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하러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년 6월 15일 선종한 곳이다.
■ 전주교구(2곳)
전주교구 순례지는 2곳으로 ▲군산 신시도 체류지 ▲완주 오두재 교우촌이다.
신시도는 최양업 신부가 1847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하는 영국 선박을 타고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가 배가 파선되는 바람에 임시 체류했던 곳이다. 신시도 체류 중 육지로 상륙할 수 있는 방법을 끈질기게 찾았지만 결국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오두재 교우촌은 1858년 10월 3일자, 10월 4일자 서한을 썼던 곳으로 당시 허가받은 사람이 아니면 입도할 수 없었던 제주도 사목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희망의 순례자」 구입문의 02-762-1194 ‘기쁜소식’ 출판사
기사원본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70444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기원 희망의 순례 -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 인터뷰
“시복 심사, 기도와 현양운동 중요… 많이들 참여하고 입소문 내 달라”
▶ 조규만 주교는 “최양업 신부님 시복시성을 앞당기기 위해 전국의 많은 신자들이 ‘희망의 순례’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학창시절 배웠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한국교회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큰 바위 얼굴 같은 존재입니다.”
원주교구장 조규만(바실리오) 주교는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한국교회 역사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큰 바위 얼굴’에 비유했다. 미국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작품인 「큰 바위 얼굴」은 높은 산 바위에 새겨진 얼굴 형상을 바라보며 자란 소년 어니스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대한 인물로 성장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조 주교가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을 앞당길 수 있는 신자들의 활동을 제안해 배론성지(주임 곽호인 베드로 신부) 주관으로 지난 6월 15일 ‘희망의 순례’를 시작하게 된 것도 최양업 신부가 한국교회의 사표(師表)라 믿었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님은 먼저 순교성인이 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게 빛이 가려져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님도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셨고 사제들에게는 사목자의 모범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준 분입니다.”
조 주교는 최양업 신부가 박해시대에 관헌의 눈을 피해 해마다 7000리(2800㎞)를 걸어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와 강원도까지 공소 신자들을 찾아다녔던 착한 목자요 길 위의 순례자이자 땀의 순교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교회에는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가 있지만, 아직 성덕의 삶을 산 증거자로서 시복시성되신 분은 없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야말로 땀의 순교자로 마땅히 시복시성돼야 하는 분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제들도 나름대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 생활이 힘들 때 최양업 신부님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원주교구가 희망의 순례를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지난해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대했던 시복이 이뤄지지 못한 아쉬움이 깔려있다.
“지난해 최양업 신부님 시복이 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는데 교황청에서 기적 심사가 통과되지 못하면서 다시 기적 심사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교황청에서 시복 심사를 할 때 신자들의 기도와 현양운동 참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 노력의 하나로 희망의 순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원주교구에서 시작한 희망의 순례를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교구 간 협조와 홍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조 주교는 무엇보다 신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희망의 순례를 제일 빨리 알리는 방법은 신자들의 ‘입터넷’입니다. 희망의 순례에 참여해 최양업 신부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걷는 신자라면 다른 신자들에게도 참여하라는 입소문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것이 희망의 순례가 가장 빨리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교계 언론에서도 역할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
조 주교도 희망의 순례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희망의 순례 순례지 30곳을 다 걷지는 못해도 시간을 내서 가능한 대로 순례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희망의 순례는 원주교구에서 앞장서야 하는 운동인 만큼 저도 걷겠습니다.”
조규만 주교는 마지막으로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이 신앙의 후손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최양업 신부님 시복시성은 신앙의 후손들인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얼마만큼 열심히 최양업 신부님 시복을 위해 기도하고 염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의 순례에 많은 신자들이 참여하기를 희망합니다.”
기사원본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70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