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담화] 2024년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
- 작성일2024/07/12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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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
(2024년 7월 28일)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70],9 참조)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
(2024년 7월 28일)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70],9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나이 들고 쇠약해졌을 때에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사회에서의 역할이 줄어들었을 때에도, 우리 삶이 덜 생산적이고 쓸모없다고 치부될 위험이 있을 때에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을 중시하지 않으십니다(1사무 16,7 참조). 하느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관심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선택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돌 하나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실, ‘가장 오래된’ 돌도 ‘새로운’ 돌을 받칠 수 있는 견고한 토대가 되어, 다 함께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는 것입니다(1베드 2,5 참조).
성경 전체는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심지어 당신을 배반하여도 언제나 당신의 자비를 보여 주신다는 위로에 찬 확신을 줍니다. 시편은, 우리가 보잘것없어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시편 144[143],3-4 참조). 시편은, 하느님께서 어머니 배 속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엮으셨고(시편 139[138],13 참조) 우리의 생명을 저승에서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고(시편 16[15],10 참조) 장담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늙어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욱더 가까이 계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늙는다는 것은 축복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편에서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70],9 참조)라고 주님께 올리는 간청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하게,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기까지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하고 부르짖으셨던 예수님의 극심한 고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에서 인생의 모든 단계에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과 특히 늙었을 때와 고통 중에 있을 때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성경 말씀이 명백한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외로움이, 노인이자 조부모인 우리네 삶의 암울한 동반자가 되는 경우가 너무 잦습니다.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교구장 주교였을 때, 요양원들을 방문하면서 여기서 지내는 이들을 만나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수개월 동안 가족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외로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곳에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가난한 국가들에서 노인들은 혼자라고 느낍니다. 자녀들이 이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 분쟁 상황도 생각해 봅니다. 젊은이들과 성인 남성들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징집되어 떠나고, 여성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자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고국을 떠남으로써, 많은 노인이 홀로 남겨지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와 마을에서 많은 노인이 홀로 남겨집니다. 이들은 버림과 죽음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들에서 생명의 유일한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또 다른 곳에서는, 주술을 사용하여 젊은이들의 생명력을 빼앗으려 한다고 의심하며 노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릇된 확신이 일부 지역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음이나 질병 또는 어떤 다른 불행이 젊은이들에게 닥쳐오면, 일부 노인들에게 그 죄책을 지우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반드시 맞서 싸워 근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러한 근거 없는 편견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지만, 이 편견들은 여전히 젊은이와 노인의 세대 간 갈등에 계속해서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노인이 ‘젊은이의 미래를 훔친다.’는 비난은 요즈음 어디에서나 존재합니다. 가장 발전되고 현대화된 사회들에서도 또 다른 구실 아래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노인들이 필요로 하는 값비싼 사회 복지비로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부담을 지우고 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노인들이 공동체 발전과 젊은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자원들을 전용하고 있다는 확신이 현재 만연해 있습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입니다. 노인의 생존이 젊은이들의 생존을 위험에 빠뜨리고, 젊은이들을 도우려면 노인들을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억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대 간 대립 구도는 오류이고 갈등의 문화가 맺은 독이 든 열매입니다. 젊은이들을 노인들과 대립하게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조종의 형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연령대의 일치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한 진정한 기준점이 됩니다”(수요 일반 알현 교리 교육, 2022.2.23.).
앞서 인용한,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시편은 노인의 삶을 둘러싼 음모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 말이 과장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외로움과 버려짐은 우연이나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개개인의 무한한 존엄을 인정하는 데에 실패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개인적 결정들의 결과임을 생각한다면 과장이 아닙니다. 개인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이나 상태, 상황을 넘어”(교황청 신앙교리부 선언, 「무한한 존엄」[Dignitas Infinita], 1항) 무한한 존엄을 지닌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사람을 오직 비용 측면으로만 판단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큰 비용이라 지불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도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노인들이 종종 이러한 사고방식의 희생양이 되어 스스로를 짐으로 여기고 먼저 물러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능한 한 독립적이고 다른 사람과 분리된 삶 안에서 개인적 성취를 추구합니다. 공동체 의식은 위태로워지고 개인주의가 찬양받고 있습니다. 곧, ‘우리’에서 ‘나’로의 전환은 우리 시대의 가장 명백한 징표입니다. 우리가 혼자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가장 근본적인 논거가 되는 가정마저 이러한 개인주의 문화의 희생양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고 쇠약해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회적 유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개인주의의 환상은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더 이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이 옆에 없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때에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너무 늦은 시점에서야 이를 깨닫습니다.
외로움과 버림은 오늘날 사회적 상황에서 반복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 근원은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에 이는 계산된 배제, 일종의 비극적인 ‘사회적 음모’의 결과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안타깝게도, 한 사람의 개인적인 결정의 문제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노인들이 이러한 현실에 굴복하면서 마치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인 것처럼 가장하기도 합니다. 점점 더 우리는 “형제애의 맛”(「모든 형제들」, 33항)을 잃어가고 있으며, 대안을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룻기에서 나이 든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들이 죽은 다음 두 며느리 오르파와 룻에게 고향과 집으로 돌아가도록 격려하는 이야기(룻 1,8 참조)에 묘사되는 체념이라는 감정을 여러 노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노인처럼 나오미는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다른 어떤 것도 상상하지 못합니다. 나오미는 과부로서 자신이 사회의 시선으로 볼 때 별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과 달리 앞으로 평생을 살아갈 두 젊은 여인에게 자신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하기에 나오미는 물러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젊은 며느리들에게 자신을 떠나 다른 곳에서 미래를 건설하라고 말합니다(룻 1,11-13 참조). 나오미의 말은 분명히 그녀의 운명에 낙인을 찍은 당시의 엄격한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경 이야기는 나오미의 말과 나이 듦 그 자체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반응을 보여 줍니다. 두 며느리 가운데 한 명인 오르파는 나오미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입 맞추고 유일한 해결방안으로 여겨지는 이 말을 받아들여 자기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나오미를 놀라게 하는 말을 합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룻 1,16). 룻은 관습과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나이 든 여인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될 그 순간에 나오미의 곁에 용감히 남습니다.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익숙한 우리 모두에게 “저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간청에 대하여 “저는 당신을 버려두지 않을 거에요.”라는 대답이 가능하다는 것을 룻이 가르쳐 줍니다. 룻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상황을 타개하기를 망설이지 않습니다. 곧, 홀로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대안으로 남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늙은 나오미의 곁에 남은 룻은 메시아의 조상이 되고(마태 1,5 참조),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며 모든 연령대와 생활 신분의 사람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친밀함과 가까움을 선사해 주시는 분이신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룻의 자유와 용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선택하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도 룻의 발자취를 따릅시다. 이 젊은 이방인 여인과 나이 든 나오미와 함께 길을 나섭시다. 그리고 우리의 습관을 바꾸고 노인들을 위한 다른 미래를 떠올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많은 희생이 따르지만 룻을 본받아, 노인들을 돌보는 이들 또는 곁에 더 이상 아무도 없는 친척들이나 지인들에게 날마다 친밀감을 느끼게 해 주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나오미의 곁에 남기로 한 룻은 행복한 결혼과 가정과 새로운 집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늘 그러하듯, 노인들 곁에 가까이 있고 가정과 사회와 교회 안에서 노인들의 고유한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많은 선물과 은총과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분들을 위한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에, 조부모들 그리고 연로한 가족 구성원들에게 우리의 부드러운 사랑을 보여 줍시다. 기력을 잃고 더 이상 다른 미래에 대한 가능성에 희망을 갖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시다. 외로움과 버림을 낳는 자기중심적인 태도 대신에 “저는 당신을 버려두지 않을 거에요.”라고 말할 용기를 가지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의 열린 마음과 기쁜 얼굴을 보여 줍시다.
사랑하는 조부모와 노인 여러분 모두에게, 또한 여러분과 가까운 모든 이에게 저의 기도와 축복을 전합니다. 그리고 부디 잊지 말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4월 25일
프란치스코
2024년 4월 25일
프란치스코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for the Fourth World Day for Grandparents and the Elderly, “Do not cast me off in my old age” (cf. Ps 71,9), 2024.4.25., 이탈리아어도 참조>
영어: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nonni/documents/20240425-messaggio-nonni-anziani.html
이탈리아어: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nonni/documents/20240425-messaggio-nonni-anziani.html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42272?gb=K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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