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부활 메시지
- 작성일2020/03/12 14:08
- 조회 1,058
[2011 부활 메시지]
부활대축일을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긴 사순시기가 끝나고 부활이 다가왔습니다.
올해 사목교서의 주제는 ‘성체성사와 함께하는 성화의 해’입니다. 사순절에서 부활시기로 넘어가는 전례주기의 가장 정점에 선 이 때에 성체성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봅니다.
사순시기동안의 전례가 표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호산나’로 환호하는 영광의 뒤안길에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피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생의 마지막 길에서 당신께서 살아오신 삶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십니다. 특별히 성삼일의 전례는 그러한 예수님의 삶을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체성사’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성삼일의 전례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당신 생의 마지막 만찬을 하시던 날, 비장한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빵과 포도주로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희생’과 ‘나눔’의 본을 보여주시고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말로만 그러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십니다. 무력하게 자신을 내어놓는 그 모습은, 자포자기나 현실도피가 아니라 당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는 선포로 보여주신 당신이 하시던 일에 대한 결정적인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선택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입니다. 모두가 실패였다고 생각하던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역설입니다. ‘희생’과 ‘나눔’이었던 예수님의 삶이 무력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삶과 그분의 죽음까지도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서 바로 세우신 것이 부활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삶이 참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 이것이 파스카(Pascha-건너감)요, 성체성사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넘어 다시 생명에로 넘어가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이요,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지난 사순절의 시작에 발생한 이웃나라 일본의 대지진은 수많은 상처를 우리에게 던져주었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덥쳐 버린 초대형 쓰나미는 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수십만 이재민의 삶의 안식처와 일자리를 쓸어버렸으며, 수백만의 가족들에게 슬픔과 탄식을 남겨 주었습니다. 자연의 재해는 그렇게 끝나지 않고,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놓은 시설물의 파괴로 이어져 방사능 공포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언제 끝날지조차 예측이 어려운 지경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지구가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이번 대지진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손으로 키워놓은 과학의 힘이 역설적으로 지구가 하나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줍니다.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이들의 상처를 감싸 안고 보듬어 주어야 할 이가 누구일까를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로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는 남의 나라이기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어하는 심정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야말로 ‘세계는 하나’라는 구호가 허공에 울려퍼지는 구호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넘어 생명에로’ 넘어가도록 우리의 기도와 손길이 닿아야 합니다. 엄청난 재앙으로 생명의 숨결을 빼앗긴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애로운 숨결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를 보태야 하고, 그 재앙으로 실의에 빠진 이들이 생명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우리의 손길을 더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어지는 재앙을 막으려는 노력들이 보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격려와 건전한 비판을 보내야 합니다. 아울러 과학의 힘으로 한없이 교만하던 인간이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 얼마나 미약한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겸손을 새겨야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죽음의 문화를 바라봅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사회의 한 흐름을 이루어 ‘생명경시풍조’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폭력과 파괴를 미학적으로 다루는 영화와 TV, 대중매체, 게임 산업, 낙태 등을 허용하는 사회적 규범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영향들 속에서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반생명적 문화, 죽음의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자살’이라는 말이 너무도 빈번하게 들려옵니다. 대학교수에서 학생에 이르기까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에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자살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한 권리인양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의 당사자의 절박함을 고려한다고 해도 너무도 분명한 것 하나는 자살,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포기’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을 나누어 받은 생명은 그렇게 쉽게 포기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선택의 폭이 아무리 좁더라도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삶의 절박한 순간들에 생명을 선택하는 문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에 대한 선택을 통해서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뜻이요, 우리가 살아야 할 성체성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부활은 살리는 선택, 곧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부활대축일을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긴 사순시기가 끝나고 부활이 다가왔습니다.
올해 사목교서의 주제는 ‘성체성사와 함께하는 성화의 해’입니다. 사순절에서 부활시기로 넘어가는 전례주기의 가장 정점에 선 이 때에 성체성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봅니다.
사순시기동안의 전례가 표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호산나’로 환호하는 영광의 뒤안길에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피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생의 마지막 길에서 당신께서 살아오신 삶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십니다. 특별히 성삼일의 전례는 그러한 예수님의 삶을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체성사’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성삼일의 전례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당신 생의 마지막 만찬을 하시던 날, 비장한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빵과 포도주로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희생’과 ‘나눔’의 본을 보여주시고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말로만 그러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십니다. 무력하게 자신을 내어놓는 그 모습은, 자포자기나 현실도피가 아니라 당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는 선포로 보여주신 당신이 하시던 일에 대한 결정적인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선택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입니다. 모두가 실패였다고 생각하던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역설입니다. ‘희생’과 ‘나눔’이었던 예수님의 삶이 무력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삶과 그분의 죽음까지도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서 바로 세우신 것이 부활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삶이 참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 이것이 파스카(Pascha-건너감)요, 성체성사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넘어 다시 생명에로 넘어가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이요,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지난 사순절의 시작에 발생한 이웃나라 일본의 대지진은 수많은 상처를 우리에게 던져주었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덥쳐 버린 초대형 쓰나미는 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수십만 이재민의 삶의 안식처와 일자리를 쓸어버렸으며, 수백만의 가족들에게 슬픔과 탄식을 남겨 주었습니다. 자연의 재해는 그렇게 끝나지 않고,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놓은 시설물의 파괴로 이어져 방사능 공포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언제 끝날지조차 예측이 어려운 지경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지구가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이번 대지진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손으로 키워놓은 과학의 힘이 역설적으로 지구가 하나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줍니다.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이들의 상처를 감싸 안고 보듬어 주어야 할 이가 누구일까를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로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는 남의 나라이기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어하는 심정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야말로 ‘세계는 하나’라는 구호가 허공에 울려퍼지는 구호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넘어 생명에로’ 넘어가도록 우리의 기도와 손길이 닿아야 합니다. 엄청난 재앙으로 생명의 숨결을 빼앗긴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애로운 숨결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를 보태야 하고, 그 재앙으로 실의에 빠진 이들이 생명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우리의 손길을 더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어지는 재앙을 막으려는 노력들이 보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격려와 건전한 비판을 보내야 합니다. 아울러 과학의 힘으로 한없이 교만하던 인간이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 얼마나 미약한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겸손을 새겨야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죽음의 문화를 바라봅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사회의 한 흐름을 이루어 ‘생명경시풍조’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폭력과 파괴를 미학적으로 다루는 영화와 TV, 대중매체, 게임 산업, 낙태 등을 허용하는 사회적 규범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영향들 속에서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반생명적 문화, 죽음의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자살’이라는 말이 너무도 빈번하게 들려옵니다. 대학교수에서 학생에 이르기까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에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자살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한 권리인양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의 당사자의 절박함을 고려한다고 해도 너무도 분명한 것 하나는 자살,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포기’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을 나누어 받은 생명은 그렇게 쉽게 포기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선택의 폭이 아무리 좁더라도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삶의 절박한 순간들에 생명을 선택하는 문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에 대한 선택을 통해서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뜻이요, 우리가 살아야 할 성체성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부활은 살리는 선택, 곧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2011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주교 김지석
천주교 원주교구장 주교 김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