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사순 제4주일 교구장 메시지
- 작성일2020/03/2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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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무 16,1-13: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화답송: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제2독서: 에페 5,8-14: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복음: 요한 9,1-41: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되게 하려는 것이다.”
+ 찬미예수님,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 제4주인 오늘은 우리 원주교구 설정 55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모두가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든 요즈음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희망하며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쥐의 해 경자년을 시작하면서, 저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서간충비(鼠肝蟲臂)’를 말씀드렸습니다. ‘서간충비’란 ‘쥐의 간과 벌레의 팔 다리’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자.’ ‘보잘것없는 것을 무시하지 말자.’라는 의미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인은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 17) 그러나 수건에 싸서 보관한 한 미나를 바치는 종에게 ‘이 악한 종아!’라고 질책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기 마련이고,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자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벌레에 속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소홀히 여겼던 탓에 오늘의 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자가격리’ 수준으로 지낸 지가 벌써 4주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이번 사순절의 의미를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간 우리가 얼마나 편하게 서로 만나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 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신자들을 그리워하고, 신자들이 미사를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사를 드리고, 사제들이 교우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한편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 노력하는 의사와 간호원을 비롯한 모든 봉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모두들 하루빨리 마스크 없는 일상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눈’과 ‘보는 것’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제1독서 사무엘기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으로 보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보고 판단할 때 잘못할 수 있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일상에서 자주 체험하는 일입니다. 멋진 말과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외모가 훤칠한 다윗 형제들에게 마음이 갔지만, 마음으로 보시는 하느님의 시각으로 별 볼 일 없는 양치기 소년을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붓습니다.
우리의 시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시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맹인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력이 1.5나 2.0이면 대단히 좋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다 해도 멀리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끔 멀리 있는 물체가 사람인지 나무인지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고속도로 공사 지점에 빨간 깃발을 흔드는 마네킹을 가끔 봅니다. 그것이 과연 실물인지 아주 가까이 가야만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먼 것을 위해서는 망원경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은 보지 못합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렇습니다. 현미경도 전자현미경을 이용해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더 잘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소경을 보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그런 기적을 일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시비를 거는 유다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가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마태 13,14 참조)는 예수님의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차라리 볼 수 없었다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들을 수 없었다면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헬렌 켈러(Helem Adams Keller 1880-1968)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아는 사람은 귀머거리뿐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는 소경밖에 모릅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오는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사흘만 볼 수 있다면], 21-22쪽)
우리가 세상을 마음으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은 우리 시대의 열사요, 애국자이며, 영웅들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와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와 축복을 기도합니다.
천주교 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