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소개

2022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2)
  • 작성일 : 2021-11-26

+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교우, 수도자, 사제 여러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기쁨과 평화와 건강을 빕니다.

우리는 지난 해를 ‘자선의 해’로 보냈습니다. 원주교구 평협 주최로 ‘예수님께 한 끼 식사 대접하기’와 교황님의 뜻을 따라, ‘백신 나누기’에 적극 동참해 주신 교우 여러분들에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더욱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나누는 일은 항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밝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은 해마다 사순절에 세 가지를 훈련합니다. 바로 ‘기도’ 와 ‘자선’ 과 ‘단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듯이,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훈련입니다. 심리학을 통하여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열등의식, 자아분열, 자폐증, 대인공포증 등을 일으켜 자신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하고, 가정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절제’는 동양에서만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중요한 덕목의 하나입니다. 절제는 용기, 현명, 정의와 더불어 사추덕(四樞德)의 하나입니다. 절제는 기쁨과 쾌락을 악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는 자신의 주체성을 위한 덕목이요, 자신의 행동과 말에 있어서 자신이 꼭두각시가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자질입니다.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훈련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은 ‘단식’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식욕을 절제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루를 굶어도 먹는 것을 참기 어렵습니다. 성욕은 한 달 두 달을, 사람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기간을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명예욕은 4년이나 5년이 걸리는 선거 때를 기다리며 오랜 기간을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절제라는 덕목을 수양하기 위해 우리에게 단식의 훈련을 제안하셨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6-18)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식을 제안하시기 전에 몸소 사십 일간 단식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고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루카 4,1-2) 그렇지만 이어지는 악마의 유혹들(루카 4,3-13)을 이겨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은 결국 당신의 행위에 대하여 당신 자신이 주체자였으며, 진정한 자유인이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은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에서 당시 나치들이 재미삼아 유다인들에게 당근을 던져주며, 배가 고픈 포로들이 당근을 향하여 달려드는 것을 즐겼던 상황을 전해줍니다. 그 상황에서 그는 비록 감옥에 갇혀있을 지라도 당근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자제함으로써 그들의 농락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그 내면에 성자처럼 행동하든지, 혹은 동물처럼 행동하든지 두 가지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인간의 ‘내적 자유’를 깊이 연구하여 심리학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외적으로 속박되어 있을지라도, 본인의 의지에 따라 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탐함으로써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창세 3장 참조)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고달픈 현실을 느끼면서 과거 원조 아담과 하와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치 자신은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긴 에사우의 이야기(창세 25,29-34)를 알고 있습니다. 에사우를 보잘것없는 것에 귀한 것을 팔아넘긴 딱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처럼. 과연 그렇습니까? 사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에사우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약한 의지를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악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선한 일인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절제는 의지에 속한 문제입니다. 사람에 따라 의지가 강한 사람도 있고, 의지가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높은 아이큐를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낮은 지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듯이 말입니다. 낮은 지능을 지닌 사람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높은 지능을 지닌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입니다. 그런데 의지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듯 싶습니다. ‘나는 의지가 약해.’라는 말로 자신을 규정짓고, 더 이상 노력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한 의지를 지닌 사람은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보다 더 많은 훈련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강한 의지가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 강한 의지가 악한 의지라면 더 많은 해를 사회에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합니다. 선한 의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베르토 아싸지올리(1888-1974)가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의지에도 단계적 훈련을 통해서 강한 의지로 키워갈 수 있다고. 또한 우리에게는 초월적 의지, 소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도 가능하다고. 그렇습니다. 의지가 약한 우리들도 단계적 훈련으로 의지를 강하게 키울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이 결심한 것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인들의 회개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단식은 먹는 것이 악행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식은 먹는 행위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야지, 먹는 것만 보면 게걸스럽게 되는 일은 음식이 나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이지, 술이 우리를 마셔버리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게임을 해야 하는 것이지, 게임이 청소년들을 놀이감으로 만들면 안됩니다. 성욕의 절제는 성이 악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절제하지 못한 성욕으로 추락한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명예욕의 절제는 명예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절제하지 못한 욕심으로 비참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무절제한 행동은 우리로 하여금 주체성을 지키지 못하게 하여 예상치 못한 혼란과 불결한 생활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소위 도박이나, 알코올이나, 또는 성적 욕망이나 재물에 중독이 된 사람들은 중독물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단식을 비롯한 절제는 우리 자신을 자유인이 되도록 합니다. 음식에 자유롭다는 건, 먹고 싶은 것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도 기꺼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음식에 있어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일에 자유롭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원주교구민들이 올 한해 단식을 통한 훈련을 통하여 절제의 덕을 닦아, 우리 행동을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코로나-19로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2021년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원주교구 조 규 만 바실리오 주교

지난사목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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