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은총의해]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로마 5,17)
- 작성일 : 2024-11-29
+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교우, 수도자, 사제 여러분!
우리는 희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25년을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주제로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한편 1965년 3월 22일에 설립된 우리 원주교구는 올해 60주년을 맞이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많고 큰 은총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총”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은총을 받았다.” “하느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등등. 자주 사용되는 이 용어는 교회 용어로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여러 히브리어 단어를 통하여 하느님의 “호의”, “성실성”, “정의”, “불쌍히 여기심” 등으로 은총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시면서 그에게 자애(호의)를 베푸시어, 전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창세 39,21), “나리께서는 이제껏 저에게 하신 것처럼 큰 은혜를 베푸시어(성실하심으로) 저의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창세 19,19), “나는 동정심(불쌍히 여기심)을 가지고 돌아왔다.”(즈카 1,16), “보라, 임금이 정의로 통치하고 제후들이 공정으로 다스리리라.”(이사 32,1)
신약성경도 은총을 뜻하는 그리스어 Χαριs(karis)는 그 동사 χαιρομαι: kairomai가 ‘기뻐하다’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Χαριs는 기쁨을 주는 상태, 매력, 호의, 공감, 친절, 선물 혹은 감사, 선한 기쁨, 선의와 상통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Χαριs)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Χαριs)를 받았다.”(루카 1,30)
그러므로 “은총”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의 어떤 업적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무조건적으로, 거저 베풀어 주시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 원주교구는 지난 60년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장했습니다. 원주교구 역사는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지 주교님은 아주 작은 규모로 교구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본당 13개, 신자 13,390명, 사제 20명(방인 사제 9명, 골롬바노회 사제 11명)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오늘날 본당 54개, 신자 80,894명, 사제 123명으로 성장했습니다.(2023년 통계) 그동안 많은 사제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많은 성당들이 건축되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성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혼인을 축복받았으며, 거룩한 미사를 통하여 주님의 성체로 영적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 교구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첫째, 우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은 ‘무(無)’에서 ‘유(有)’가 되는 것은 커다란 기적의 하나라 했습니다. 분명 우리는 100여 년 전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큰 은총입니다. 둘째, 우리는 인간입니다. 불교에서도 후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전생에 커다란 선업(善業)을 쌓아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대단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성자께서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사람이 되셨음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하느님의 육화(肉化)라고도 말하는 하느님의 강생(降生)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만큼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셋째,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일은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해 말할 수 없는 혜택입니다. 어느 시인이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알고, 주변의 지인이 건넨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선생님은 믿음을 가졌으니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그는 속으로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고 하였습니다. “당신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지, 신앙이 얼마나 지랄 같은지!” 분명 믿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인의 말에는 ‘우리는 신앙이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불안한지 모릅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처럼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덕목입니다. 더욱이 신앙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 역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은 희노애락(喜怒哀樂)으로 교차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일상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라는 소설은 주인공 뉴욕 월가의 변호사 벤이 사람을 죽이고, 아내와 자녀들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괴로운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 말미에 주인공의 회한이 담긴 독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계곡을 바라다보며 내가 농담 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에 젖어 들곤 한다. 가끔 밤이면 게리의 지하실에서 사체를 절단하는 광경이 계속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 와인병을 손에 쥐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 주인공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 때로는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그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지나간 시절의 고통과 시련까지도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 사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어디로 가는지?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래가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성가로 찬송가로 노래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은총(Amazing Grace)”입니다. 성공회 사제 존 뉴턴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여 만든 가사를 이미 존재하는 곡조에 맞추어 부르게 된 성가입니다. 불쌍한 죄인을 구원해 주신 것, 한때 눈멀었으나 볼 수 있게 된 것, 내 마음에 두려움을 거두어 주신 것, 많은 역경을 거쳐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것, 그리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며, 영원토록 나의 주님이 되어 주시는 것을 ‘놀라운 은총’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교구설정 60주년을 맞이하여, 그리고 교황님이 선포한 희년을 맞이하여, 좋은 생각, 선한 마음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합시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놀라운 은총을 받은 것을 감사하며 우리도 이웃에게 사랑과 호의를 베풉시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2024년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 규 만 바실리오 주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 규 만 바실리오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