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소개

2019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요한 4,16)
  • 작성일 : 2020-03-12

+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원주교구 교우 여러분! 그리고 수도자와 사제 여러분!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저는 소임 첫해를 ‘믿음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를 ‘희망의 해’로 보냈습니다. 이제 올해를 ‘사랑의 해’로 정하였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교인에게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일찍이 고백하였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도대체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정의(定義)는 수없이 많습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라는 노래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정의가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죽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에 죽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사랑에 관해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사도 바오로의 사랑론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내가 내 남편을 사랑한다면, 내 남편을 얼마나 내가 참고 기다렸으며, 친절한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친구를 사랑한다면, 얼마나 내가 친구를 시기하지 않고, 친구에게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지 성찰하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내가 얼마나 자녀들에게 무례하지 않았고 성을 내지 않았는지를 반성하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라를 사랑한다면 내가 얼마나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하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얼마나 내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냈는지를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은 그저, 느낌, 감정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도 야고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6). 그러므로 사랑은 그 실천이 진정성의 척도가 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랑의 요람인 가정을 강조하셨습니다. “인내와 노동의 기쁨, 형제애, 거듭되는 너그러운 용서, 그리고 특히 기도와 삶의 봉헌을 통하여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사랑의 기쁨], 86항) 그렇습니다. 가정이야말로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요, 사랑을 배우는 곳이며, 사랑이 성장하는 곳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며,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고,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러한 행복한 가정이 많을수록 그 본당 공동체는 행복한 공동체가 됩니다. 가정은 바로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이룩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물론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그리워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30-40년을 사랑으로 기르고 가르치신 부모의 사랑을 떠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하느님의 약속이며 우리의 희망입니다.”([진리 안의 사랑], 2항) 만일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끔찍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에너지를 사랑이 아니라 경쟁에 사용한다면 아비규환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이 그 에너지를 사랑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특히 젊은이들의 열정들을. 그리고 기억해보십시오. 젊은 시절 사랑 때문에 허비했던 많은 시간과 정열들을. 그 에너지가 사랑이 아니라 경쟁에 사용되고,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 사용되었더라면 세상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생지옥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한편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부부간의 성적인 사랑 에로스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인 성녀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 아가페가 서로 적대적이 아니라 보완적이라고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 에서부터 시작해서 부부의 성적인 ‘에로스’를 넘어 이웃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적이요 위타적인 사랑 ‘아가페’로 성장하고 완성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의 사랑은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직도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헌신적인 사랑, 아가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부들의 꾸준한 사랑을 도와주는 ME(메리지 엔카운터)는 대.성.기.공 4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부부가 계속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대화, 부부사랑 에로스, 기도,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부 두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이웃 부부들, 이웃 가정들, 더 나아가 친정과 시댁, 심지어 신심단체나 본당 공동체 등 다른 사람들과 단체를 필요로 합니다. 혼자 행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정만 행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가정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홀로 가능하지 않듯이, 천국도 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만 천국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다음의 대상은 이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율법교사처럼 물을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우리는 또 다시 예수님의 비유를 상기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듯이, 우리의 이웃은 그 누구보다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를 비롯해서 많은 은인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은혜를 베풀어야 할 사람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입니다. 마치 강도 맞은 사람이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이웃이었듯이.

사랑의 다음 대상은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3-48)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명하시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어쩌다가 원수가 되었습니까? 돌이켜 보면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신 당하거나 상처를 입으면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원수는 용서와 사랑으로 친구가 될 수 있고, 연인이 될 수 없을까요? 원수에 대한 미움은 원수가 아닌 자신에게 계속 상처를 입힐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미워하게 됩니다. 이것을 악순환이라고 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원수를 친구로, 연인으로 바꿉니다. 어쩌면 원수는 우리의 용서와 자비를 받아야 할 이웃일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사랑은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손입니다. 이미 신앙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받을 수 있는 손이라 했습니다. 사랑은 또 다른 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1-46). 이들이 행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는 것,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 병든 이를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를 찾아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영원한 삶을 희망합니까? 그러면 사랑하십시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이 영원합니다. 사랑이 전능합니다. 바로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원주교구 교우 여러분들! 그리고 수도자와 사제 여러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증언하는 한해를 살아갑시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빕니다.

 

2018년 12월 대림절에
천주교 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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