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유적지

용소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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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용소막 루르드의 성모 성당

본당 설립 과정

1866년 병인박해 무렵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용소막 인근에 흩어져 살다가 1893년부터 용소막으로 한두 집씩 이사 오고, 당시 전교회장으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던 최도철 바르나바까지 이주해 오면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최도철 바르나바는 1898년 1월 13일 5-6명의 교우들과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10칸의 아담한 경당을 짓고, 원주 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소 설립에 힘썼다. 공소가 개설된 다음 해인 1899년에 오미에 살던 백(白)씨 일가와 행주(幸州)에 살던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일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900년 10월 24일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 경당을 축복하였다.

뮈텔주교는 신자들의 증가에 따라 풍수원, 원주(현 주교좌 원동) 본당에 이어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1904년 5월 4일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설립하였다. 초대 주임으로는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V. Poyaud, 表光東) 신부가 임명되었다. 2대 주임으로는 용산 신학교 교수이던 기요(J. Guillot, 吉) 신부가 부임하여 1913년 새 양옥 성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장마철을 이용하여 성당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운반해 오는 일을 시작하였다. 1914년 4월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착공한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성당건물의 수난과 본당의 발전 과정

1939년 4월 25일 춘천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신설됨에 따라 용소막 본당은 서울대교구에서 춘천교구로 소속되어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본당신부로 사목을 하기도 하였다. 7대 주임으로 부임한 갤라거(F. Gallagher, 갈) 프란치스코 신부는 1940년 7월에 관할 구역 안에 있던 제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시켰으며, 1941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4년제 학교인 명덕국민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3년에는 태평양 전쟁을 벌인 일본군에 의해 성당의 종을 공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때는 6.25 전쟁이 발발해 성당은 공산군들의 식량 창고로 전락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되었으며, 성당 천장도 총탄 세례를 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 아울러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 사목 문서도 모두 불에 타 버렸고, 회장들이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숱한 고초를 당하였으며, 일반 교우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신설됨에 따라 용소막 본당은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로 이관되었다. 1988년 11월에는 용소막에서 태어나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고, 성경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선종한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을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개관하였고, 피정 센터인 두루의 집과 지하 성체조배실을 새로 준공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고딕 양식을 변형시킨 소규모 벽돌조 성당의 전형적 형태인 용소막 성당은 1986년 5월 2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5월 5일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제2대 원주 교구장 김지석 주교의 주례로 기념미사와 축하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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